Brand New 1


2006.9.13 – 2006.10.31

101-5 Cheongdamdong, Gangnamgu, Seoul

Exhibition Date : 2006.9.13 – 2006.10.31

Artists : 권두현, 도성욱, 배준성, 이강욱, 최우람, 한기창


다양한 장르에서 국내외 콜렉터와 딜러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 미술 시장을 이끌어갈 젊은 작가 6명의 전시

권두현


디자인, 공예, 회화 등 다양한 시각예술 분야를 두루 섭렵한 이력을 가진 권두현은 2002년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하던 중에 본격적으로 사진작업에 몰두하였다.


권두현의 사진은 상이 뚜렷하지 않다. 그는 움직이는 피사체에 카메라를 대고 셔터 스피드 값을 조절하여 흔들리는 모습 그대로 사진을 찍는다. 그렇기 때문에 피사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는 여러 상이 겹치거나 흐릿해지지만 움직이지 않은 부분은 상이 또렷이 드러난다.


작가는 운동하고 있는 피사체에 대해 몰입하여 피사체가 흔들어 놓는 주변의 공기를 포착해낸다. 그래서 정지된 화면인데도 흐름이 감지된다. 단순히 시간의 경과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춤을 추고 있다고 할까?


여기에 더해 작가는 사진에 회화적인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인화지가 아니라 면종이나 한지에 프린트하고, 프린트한 이미지를 캔버스 틀에 붙인다. 그리고 난 후 프린트된 이미지 위에 붓을 이용해 직접 색칠을 하거나 캔버스 틀 옆면에 색을 첨가하기도 한다. 이렇게 움직이는 피사체를 찍은 뚜렷하지 않은 사진은 면 종이에 프린트 되면서 또 한번 흐릿해지고 거기에 색을 덧입음으로써 왜곡의 단계에 이른다.


이쯤 되면 권두현의 사진은 상이 명확하다 흐릿하다라는 표현보다는 사진이 회화적으로 변환되었다는 설명이 맞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사진적인 행위 이후 인화와 채색의 과정이 더해지면서 사진과 회화와의 경계가 모호한 권두현 사진의 특성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권두현의 흐린 이미지는 작가의 말대로 “상이 뚜렷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흐린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지난 경험을 돌아볼 수 있는 여지를 줌으로써 감정적 변화를 일으킨다.” 흔들리고 있는, 아니 그의 표현대로 춤을 추고 있는 이미지들은 기억의 형태와 매우 닮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사진기에 잡힌 사소한 장면, 순간 포착된 대상이 아무것도 아니었을 일상을 흔들어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물론 우연성의 혜택이지만 더 나아가 작가 자신이나 관객으로 하여금 이미지를 통해 작가의 비의식을 들여다보게 하는 성찰의 과정이다.

도성욱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어둠
그림보기를 업(業)으로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림보기가 일이 아닌 그저 가볍고 단순한 놀이이기를 희망한다. 이것저것 난해하고 어려운 글의 도움 없이도, 시시콜콜 그림에 대해 지껄일 필요도 없이 느긋하게 보고 즐길 수 있기를 꿈꾼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희망의 속내는 바로 첫 눈에 반하는,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모든 이성적 작용이 일순간 마비되고 넋을 놓치게 되는 그런 작품과의 인연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알기에 오늘 만난 도성욱의 작품들이 이렇듯 반가운지도 모르겠다.


The Shining Dark
물기어린 공기가 가볍게 일렁이는 짙푸른 나무숲 사이로 새어 드는 한줄기 빛, 반쯤 열린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빛의 덩어리, 그 자체이다. ‘빛’을 그리는 작가 도성욱의 그림은 상반되고 이질적인 요소들의 극적이고도 오묘한 조화로 완성된다. 빛과 어둠, 어둠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온화한 기운을 뿜어내는 빛과 밝음으로 인해 더욱 농짙어지는 어둠과의 어울림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는 빛을 그리게 된 이유를 ‘ 빛이란 비물질화된 하나의 형상이지요. 그 자체로 구상에서 보여지는 사물의 형상 재현이라는 틀이 없쟎아요. 형태가 없으니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구성이 가능하고 또 그 빛이 접촉하는 모든 물질을 비물질화시키는 효과도 만들어 낼 수 있쟎아요..’라고 말한다.


물과 바람, 공기처럼 특정한 하나의 형태로 가둘 수 없이 자유로운 도성욱의 ‘빛’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미묘한 진동에 따른 자연 대상의 변화를 일순간 빠짐없이 화폭에 옮겨 내려 애썼던 먼 과거의 인상주의자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대기의 습기, 온도에 따른 빛과 색의 변화가 아닌 자신의 마음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분위기’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어둠이 막 걷히기 시작하는 새벽 숲에 드리워진 빛이 더욱 희망적으로 보이는 것도, 태양이 긴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순간 숲에 깃든 고단하지만 여유로운 마음도, 작렬하는 태양 빛 아래로 떨어지는 잎새들의 그늘에서 배어나는 시원한 휴식 역시도 그만의 빛이 전하는 마음 풍경이다.


예전의 작업들이 빛의 다양한 각도에 따른 대상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에 치중했다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조금 더 치밀하게 빛 자체와 그것의 심상적 이미지 전달에 몰입하고 있다. 하나의 화면 안에 어둠과 빛이 거대한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양분되지만 결국 어디쯤에선가 화해를 이루어 빛이 머무는 풍경이 완성된다. 특히 밝음과 어둠의 극대화된 대비를 통해 숲의 전경은 한 점의 모노톤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와 더불어 가장 물질적인 대상조차도 빛이 가 닿는 순간 알 수 없는 황홀한 기운으로 감싸여지고 작가가 원하듯 사물의 물질성이 비물질화 되어가는 찰나를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모두에게 낯익은 그만의 풍경
비물질적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빛을 선택한 그는 빛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선택했다. 그리고, 한번쯤 꼭 가본 적이 있는 듯한 아니면 한번쯤 꼭 가보고 싶었던 나무숲을 그린다. 관객들은 ‘여기가 어디예요? 무슨 나무예요?’라고 꼭 묻는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저 침묵한다.


도성욱이 그리는 나무나 숲은 결코 세상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다. 일상의 편린처럼 스쳐 지나간 무수한 풍경의 잔상들은 그의 망막에 희미한 기억으로 남겨지고 어느새 마음 속에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캔버스 위에 새로운 세상으로 열린다.


그의 나무숲 그림들은 언뜻 굉장히 사실적인 작품처럼 보여진다. 섬세한 재현의 필치로 중무장했을 듯한 대상들은 세밀한 묘사대신,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가 하나의 거대한 면을 이루고 그안에서 색의 다양한 톤 변화가 붓자욱들과 절묘하게 뒤엉켜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 나무를 이루는 줄기, 잎들을 기막히게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형상의 재현에 치중하기 보다 자신의 마음 속, 형체가 없는 풍경에 ‘나무숲’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고 ‘마음’의 변화에 따른 ‘빛의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사실적인 그림과는 거리가 먼 (..왜냐하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또한 완벽하게 재현적인 묘사를 의도하지 않으므로..) 그의 그림을 우리는 왜 사실적이라는 인상을 얻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만의 마음 풍경이 낯설지 않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유토피아적 숲을 우리 모두 각자의 가슴에 하나씩 품으며 살기 때문이 아닐까. 낯선 풍경 임에도 낯설지 않고, 익숙함에도 지루하지 않은 그의 나무숲에는 함께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우리들의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 김윤희 (포스코미술관 큐레이터)

배준성


19세기 말 영국에서 출간된 유명한 에로 서적 제5장은 ‘관음주의(voyeurism)’에 관한 긴 묘사로 시작된다. 어느 날 정오에 무기 제조상의 아들인 저자의 친구가 그를 자기 부친이 경영하는 작업장 지하실로 데리고 간다. “그는 날 유리 창문 아래로 데리고 갔다. 나는 창문위로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다리들을 보았다. 나는 즉각 감을 잡았다. 이 지하실은 바로 길 아래로 이어져 있었고, 보도를 덮은 유리포석을 통해 빛을 받고 있었다. 며칠 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종아리와 허벅지들을 감상했다.  우리는 양말대님과 그 위로 삐져나온 살덩이들을 보았다. 그렇지만 다른 나머지 것들은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옆방 열쇠를 찾아내었고, 이 옆방은 유리창이 아닌 쇠창살로 된 창으로 빛이 들어왔다. 그 당시 여인들은 바리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페티코트가 유행이었다(…). 아래서 보면 치마 밑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장면의 한 구석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수 많은 예쁜 엉덩이들을 많이 감상했다. 때로는 다리의 특수한 위치 덕분에 금색, 다갈색, 검정색 털이 보송보송한 여성 성기를 보기도 했으며, 때로는 생생한 불그스레한 피부를 보았다(…).우리는 또 나이든 여성의 그것들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 장면들을 감상하는 데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성들이 그들 시선에 그들 해부의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장면 앞에서 이 두 젊은이들에게 물려온 어쩔 수 없는 열기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열기는 자세히 설명하기엔 낯 뜨거운 넘처남 속으로 이끌어 들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벗은 몸들이 도시의 벽에 영합적으로 아양을 떨면서 펼쳐져 있지 않는가? 한 모스크바 오프닝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느닷없이 솟아나는 음욕과 함께 배준성 인물들이 걸치고 있는 옷을 올리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들의 거칠고 게걸스런 동작은 바로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의 동일한 성격이 아니겠는가? 이것들은 바로 이 판타즘이 인간의 심장 속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닐까? 여하간, 숨겨져 있는 것을 거칠게 밝히려는 사실이 배준성의 작품들이 순간적으로 점화시킨 깊고. 꺼지지 않는 충동에 화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을 이러한 차원으로만 축소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이 작품들은 다소 조롱적 이면서도 절묘하게 암시적인 방식으로 어떤 아카데미 안에서 전문인들에 의해 행해졌던 전통적 방식의 화가 직을 환기 시킨다. 우리는 배준성이 수 없이 그렸던 다비드David와 앵그르Ingres의 그림들 속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적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벗은 몸들은 매우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다. 때로는 이 몸들은 적당한 포즈를 취한 실제 모델을 보고 그려졌다. 이어서 여러 다른 인물들은 다시 조합되고. 마침내 그려진 화면 위에서만 그들의 의상으로 다시 옷 입혀진 채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배준성은 하나의 동일한 작품 안에서 이러한 긴 과정을 요약한다.


사진적 재생의 차가운 완벽함으로 으리으리한 모델의 조각적 신체는 어떤 이상적 가치에 도달하는데, 이 가치는 옷주름들을 솜씨 좋게 잘 그리는 것으로 만족한 붓의 불완전한 거장의 솜씨와 매우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이 두 기술의 대비는 서구적 의상과 아시아적 몸을 나란히 놓은 낯설음이 또 다시 강조하는 어떤 긴장을 창조한다. 이것은 마치 극동 아시아의 현대 사회의 근원에 존재하는 동서양의 근본적 충돌이 지속적으로 다시 재현 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이 긴장은 때로는 계속 붙들고 있기가 어렵다. 앵그르Ingres, 싸젼트Sargeant, 르펭Repin, 반다이크Van Dyck 외에도 배준성에게는 부게로Bouguereau나 알마 타데마Alma-Tadema식의 치장들의 유혹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조롱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로부터 멀어져 버린 어떤 회화의 부드러운 무기력과 가장 최근의 사진의 단호함이 충돌하는 이 작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카데믹한 회화, 다시 말해서 비난받고 무시당하는 이 회화 직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향수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금년에 그려진 정물화들을 더 좋아할 수도 있다. 현대식 부엌의 보잘것없는 평범함이 바로크적인 꽃이 만발하고, 과일들과 고풍스런 식기들로 채워진 정물화의 배경이 된다. 회화적 인용이 차가운 사진적 사실을 가리면서 솟아난다. 이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공유된 명확한 상징으로서, 그것은 단지 의미가 비워진 기호 집에 불과하다.


저급한 것이 어떤 새로운 상징성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이 텅 빈 기호들을 엄습한다. 다시 말해 저급함이 어떤 작품 속에 어떤 새로운 차원을 불어 넣어 주는데, 그 작품의 애매모호함은 목하 기승을 부리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속에 들어있다.
– 알랭 사이약(퐁피두미술센타 사진부장)

이강욱


이강욱의 회화에 대하여 : 감각들의 환영과 그 이후


원자란 편이에 의한 가정에 불과하다. 원자들이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동일한 물리적 연속성의 상이한 특질들일뿐이다. 원자는 그것의 모든 속성들, 모든 특질들로부터 물질만을 고립시키는 정신의 개념화에 해당한다. (실상) 정신은 원자를 그것의 이미지로 떠올릴 뿐 아니라 그것을 4차원의 완벽하고도 독자적인 세계로 만든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거울들에 둘러싸일 경우 그러하듯이, 3차원의 불완전한 세계가 지닌 다양한 양상들 안에 위치하는 이 특이한 원자로 하여금 무한 속에서 반사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바로 감각들의 환영인 것이다. (가스통 드 파블로프스키, <4차원으로의 여행>, ed. Images modernes, 1923)


수없이 중첩되는 선들의 율동과 그 주변에 흩어지는 무수한 점들, 커다란 운동과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공간, 멀리 보이는 희미한 얼룩들과 명멸하는 빛들… 이강욱의 회화가 재현하는 세계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들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매우 커다란 공간, 예컨대 알 수 없는 규모의 우주적 공간 같은 것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매우 작은 차원, 즉 입자(particle) 수준의 극미한 운동들이 가득 차있는 장소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이미지는 이 알 수 없는 장소에 대한 개념적이면서 구체적인 지시를 통해 그러한 공간이 지닌 아름다움을 매우 상세하게 환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화면 위에서 각각의 요소들이 자아내고 있는 재현적 구성은 거대하거나 혹은 미시적인 공간들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심미적 감동을 매우 잘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그림들은 자율적인 선과 점들의 헤아릴 수 없는 반복적 기록들이기도 하다. 선들은 마치 정확한 시작점과 굴곡들, 탄젠트들의 위치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무수히 그어졌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면서 회화적 공간을 주저(hesitation)와 탐색으로 점철된, 시선과 신체의 복수성이 생산되는 장(場)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관념적 공간과 생성적 공간의 구분은 무의미해 진다.


회화가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형언할 수 없는 색채와 선들이 서로 뒤섞이고 배열되면서 자아내는 감각의 환영일까? 아니면 회화적 구성을 통해 작가가 기재해 놓은 사유의 구체적 내용들일까? 물리적 행위와 관념적 기술, 둘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강욱은 둘 다를 가리킨다. 회화를 통해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이미지의 특질이 그것의 최대치에 달하게 되는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모순적 선택에 한정되는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 3의 방향 즉, 회화적 구성 전체가 새로운 차원의 감각-의미 항을 생산하는 장소가 되는 순간이다. 회화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것이 환영이자 동시에 구체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잠재적 이미지이자 사건들(events)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회화적 공간은 그런 면에서 세계의 탁월한 환유적대체물 (metonymic substitute)로서 제시된다. 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란 우리의 가시계(可視界)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시계 안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힘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회화적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체성에 대해 말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종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신체가 나타내는 개별성이라고 말한다. 톰블리(Cy Twombly)에 대한 글에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는 그것이 담보되어 있는 교환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어떤 거래도, 어떤 정치적 의의도 신체를 희석시킬 수는 없다. 항상 극단적인 어떤 지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체가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지적은 드로잉의 신체성이 지니는 급진적 성격을 함축한다. 이강욱의 회화에서 생산되는 것은 신체성이다. 그는 공간을 기술하고 그것에 좌표(grid)를 부여하고 로고스(logos)를 기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지워나가고 그 위에 선들을 중첩시키며 시간과 신체를 소진시킨다. 자신의 몸을 소진시킬 때 그 자취로서 기록되는 것이 회화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목적도, 모델도, 어떤 계기도 지니지 않는다. 드로잉이 지니는 정치성은 그것의 무목적적인 글쓰기(ecriture)로부터 비롯된다. 재현이 아닌 태도의 기재(inscription)가 핵심인 것이다.


이강욱의 작품은 무수한 곡선들로 이루어진다. 그것들은 때로는 방향성을 띤 긴 흐름들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치 무언가를 강조할 때처럼 원으로 윤곽을 그려나가기도 한다. 펼쳐지기고 하고 닫히기도 하는 곡선들. 곡선, 즉 굴곡(inflection)을 규정하는 것은 일정한 속도, 즉 연속적인 변화의 값을 갖는 변곡점(tangent)들의 집합이다. 각 변곡점들로부터 수직으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이 초점(동일성)을 띠기 시작하면 원이 형성되고, 초점이 흐릿해지면 점들은 일정한 범위에 걸쳐 얼룩을 만든다. 그러다가 선이 펼쳐지면 다시 곡선은 넓은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여기저기에 흐릿한 얼룩들과 흩어진 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들뢰즈는 에서 이것을 주체에 대한 기술로 다루었다. 즉 곡선은 주체를 만든다. 우주의 선(ligne de l’univers)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굴곡의 운동을 통해 매번 주체들을 생산하는데 이는 무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강욱의 그림은 이러한 보편적 우주의 선에 대한 이미지처럼 보인다. 곡선들은 때로는 맺히기도 하고 때로는 풀어지기도 하면서 화면의 바깥에서 들어와 다시 바깥으로 사라져 간다. 바깥은 수없이 서로 연결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공간이다. 이미지는 그것의 단면이자 극히 일부분으로서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난 어떤 사고(accident)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초점이 형성되는 매우 한정된 순간을 초고속노출(ultra-rapid exposure)로 포착한 이미지처럼 보인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짧은 시간적 단면의 기록을 통해 포착할 수 없는 것의 운동을 드러낸다. 연속체의 단면, 시간적 단면으로서의 회화.
사진적 은유는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은(銀)을 도포한 듯한 그의 작품의 표면은 물감보다는 광학적 반사 혹은 감광을 일으키는 오브제에 훨씬 가깝다. 실제로 이러한 표면은 화면 전체에 산포(散布)되어 있는 투명한 비즈(beads)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화려한 표면의 반사를 통해 시각적 깊이를 강조하는 이강욱의 의도는 마찬가지로 화면 위에 흩뿌려져 있는 점들의 배치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이강욱은 원근을 다루는데 있어 매우 복잡한 방식을 사용한다. 그는 세포의 사진과 같은 생물학적 이미지들을 차용한 배경의 흐릿한 얼룩 위에 다시 그것을 덮거나 지우듯이 드로잉을 한 뒤 그 위에 비즈를 뿌려 고정시키는 세 가지 다른 방식을 하나의 이미지 위에 동시에 전개한다. 배경을 이루는 이미지가 가장 작은 대상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화면에 실제로 물리적 깊이를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매우 강렬한 역동성을 부여한다. 비즈의 입자들은 마치 무한한 떨림을 일으키는 우주의 먼지들(star dusts) 혹은 빛을 실어 나르는 원자들이며 드로잉의 선에 의해 구체적 흐름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파동의 요소들이기도 하다.


이강욱의 회화가 감각적 표면을 통해 일으키는 환영은 20세기 초에 가스통 드 파블로프스키가 4차원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기술한 바 있는 원자의 속성을 떠올린다. 그에 따르면 4차원의 공간은 우리의 지각에는 포착되지 않지만 그것의 연속적인 양상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의 가시계 내에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고정시킬 수 없는 숱한 환영들의 연속체 속에서 정신이 일관된 주체를 파악하는 순간일 뿐이다. 그것은 감각적 환영을 통해 그 본질을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유일한 방법은 감각적 환영을 통한 통찰에 의해서이다. 양자역학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관찰의 유일한 방법은 관찰자의 개입에 의한 오류를 수반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 혹은 순수성으로부터 우리의 존재에 의해 영원히 격리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파블로프스키는 이미 훨씬 전에 자신의 유사-과학적 논고 속에서 탁월하게 갈파했다. 이러한 통찰은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강욱의 회화 속에서 관능성과 화려함, 그리고 회화적 본질과 통찰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사이의 상호지시적 초월을 위한 방법론적 해결이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매우 한정된 창작적 조건 속에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의 잠재성을 압축하는 방식이다. 이강욱이 끊임없이 선들의 배치를 반복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압축의 초월적 배열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선들은 그 자체가 그러한 생각의 표현이기도 하다. 사실상 모든 행위는 그것의 자취를 남긴다. 이러한 행위와 그것의 효과 간의 의존성과 그것을 일으키는 개별항들의 구분은 우리가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한 모든 것들과 상호관계를 일으키면서 그것의 불가피함을 증명한다. 모든 것들이 순수하게 연속적이라면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입자물리학자인 쥘 뷜르맹(Jules Vuillemin)은 “(인과관계의) 비-분리성은 그것에 대한 간섭을 피할 수 있는 극단적으로 순수한 구조들에게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회화는 그 자체가 순수한 구조로 존재하진 않지만 역설적으로 극단적으로 순수한 순간을 재현하기 위해 사건들의 연속체 속에서 하나의 사고(事故)를 분리해낸다. 이 분리의 방식이 바로 그것을 프레임 안에 세계를 압축해 넣는 방법이다. 이강욱의 회화 속에서 단절과 단면의 방법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세계를 재현하는 방식과 동시에 그것의 효과적 해결이 지니는 관능성을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강욱의 회화가 근본적으로 그것에 주어진 모순을 해결하고 다음 단계의 심미적 해결로 나아가는 계기이자 그것이 지닌 탁월한 매력의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관계들을 이강욱의 작품들 속에서 모두 발견해내는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한 최선의 감상인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지성과 동시에 감각에 호소한다. 우아함과 정적, 역동성과 그것의 세밀함이 그의 작품에서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의 매력을 따라 그것에 몰입하다 보면 곧 깨닫게 되는 것이다. 회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그리고 화가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우회와 배치, 압축과 함축들을 창조해냈는지를. 그리고 회화가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감추어야 하는 미덕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줄 때 그것에 대한 감상은 가장 훌륭한 보상을 약속한다는 것을 말이다.
–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 미술비평 유 진 상

최우람


국가간 연합으로 추진되고 있는 ‘기계 생명체 연합 연구소 (United Research of Anima Machine)- U.R.A.M.)’ 에서는 최근 놀라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도시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삶을 영위하는 새로운 기계 생태계가 발견되었다는 발표는 도시에너지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센세이션한 소식이 아닐 수 없는데, URAM의 연구 발표에따르면 이 새로운 기계 생명체는 태양에너지를 기반으로 광합성하는 식물처럼 도시에너지를 직접 흡수하여 생활하는 암놈과 암놈이 배출하는 빛의 형태의전기적인 에너지를 흡수하여 생활하는 수컷으로 분류된다고한다.


URAM은 이 새로운 기계 생명체는 ‘Urbanus’라고 명명하였는데, Urbanus의 암컷은 꽃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축척 된 에너지를빛으로 방출하기 위해 약 15분을 간격으로 펼쳐진다. 
이때 암컷의 생식기관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에는 다량의 전하를 가진입자가 함께 방출되는데, 이때를 기다리며 주위를 배회하던 수컷들이 자신의 지느러미를 펼쳐 입자를흡수한다.


Urbanus는 도시에너지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도시상공 200M 정도에서 주로 생활하기 때문에 주로 초고층 빌딩의 상층이나 옥상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하늘을 관찰할 여유가 없이바쁜 도시인의 눈에 띄기에는 매우 어려우나 간혹 상공에서 Urbanus를 발견했다는 어린이들의 신고가 각처에서 접수되고 있다고 한다. Urbanus는 주로 밤에 활동하기 때문에 간혹야간 촬영된 도시의 위성사진 속에서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인간의 도시문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여져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기창


한국적인 운율을 담고있는 듯한 이미지


<아트스펙트럼 2003> 전시에서 한기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밀도있고 완성된 <뢴트겐의 정원>을 보여준다. 갤러리 전시장 대벽면에 설치된 대형의 라이트박스에서는 온갖 상처와 고통과 절망의 기억을 품고 있는 공포스러운 X-선 사진들이 서로 얽히고, 접합되고, 조립되는 정형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꽃을 피워내고 있다. 그는 버려진 상처들의 흔적은 품에 안고, 정형외과의처럼 뼈와 뼈를 이어주고, 잃어버린 뼈의 자리를 이물질로 대체시키며, 거기에 따뜻한 빛의 에너지를 더해 정교한 생명체를 일궈내는 것이다.


작가는 그 사각 틀의 네 귀퉁이에 빨갛게 염색 처리된 X-선 사진을 넣어 이 치유를 갈망하는 이미지들의 집합체에 다시는 아프지 말라는 소박한 액막이의 부적을 선사했다. 빛을 받아 발광하는 X-선 사진들과 함께 굵은 붓질 자극으로 인해 투박한 목가구를 연상시키는 사각 프레임은 마치 우리 옛 선조들의 방을 장식했던 자개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벽에서 오른쪽으로는 다양한 크기의 둥근 라이트박스들이 설치되었다. 이 둥근 라이트박스에는 좀 더 가볍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들이 담긴다. 단아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 화분 속에 심어진 작고 가녀린 식물과 꽃들, 그 속에 담긴 하나 하나의 기억들과 에피소드들과 함께 작가는 자신이 지금까지 실험해 온 다양한 기법, 형태, 색채등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 한기창은 긴여정을 통해 전통적인 한국화의 재료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X-선 사진과 라이트박스라는 재료를 발견하였다. 그 재료들은 참 낯설면서도 작가의 끈질긴 노동과 능숙한 손놀임에 의해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한 이미지, 그것도 한국적인 운율을 담고 있는 듯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렇게 한기창은 끝없이 새로운 재료를 모색하고 실험하지만 자신의 뿌리인 한국화의 선, 먹의 농담, 그리고 형태 모두를 그 속에서 살려내고 있는 진정한 한국화 작가이다.
– 오승희(삼성 리움미술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