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ming Tale
2007.4.5 – 2007.5.19
101-5 Cheongdamdong, Gangnamgu, Seoul
Exhibition Date : 2007.4.5 – 2007.5.19
Artists : 김종학, 김홍주, 정광호, 한기창, Piao Guangxie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며 4월에 열린 ‘The Blooming Tale 전에서는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 과정을 통해 대상을 극대화하고, 추상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부터 표현주의 기법과, 디지털 비주얼리즘을 도입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봄의 만개를 알리고 있습니다.
비전통적인 화면 구도, 배경의 과감한 생략, 하나의 꽃으로 화폭을 가득 채움으로써 대상을 추상적인 요소로 재탄생시키는 김홍주, 구리선의 즉흥적 용접 방식으로 꽃잎, 나뭇잎, 항아리 등 일상적인 사물들을 모티브로 삼아 작업하는 정광호, 핑크색 하나로 만 작업하는 중국 작가 피아오 광시에의 연꽃 시리즈, X-ray 필름의 재구성으로 작고 가녀린 식물과 꽃들을 하나하나의 기억과 에피소드로 담아낸 한기창이 이번 The Blooming Tale 전의 주역들입니다.
행보를 돌이켜본다면 이번 소장가치전의 의미과 적중력에 그 믿음이 한층 더해질 것이다. 올해도 실로 ‘신선한’, Brand New 소장가치전이라는 전시 명에 걸맞는 작가들이 소개되며 작가들이 세상에 전하는 그들의 메시지에 함께 눈과 귀를 열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관객들을 초대합니다.
김종학
회화에 대한 본질적 물음
한 작가의 작품을 전시회라는 공개적인 과정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일은 매우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일은 또한, 피할 수 없는 어떤 위험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창조해 내는 일과 전시회를 통해 그것을 사회화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지향하는 목표도 다르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작가는 무엇을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며, 어떤 재료를 사용할 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반면에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은 자신이 바라다보는 작가의 작품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고, 어느 성향과 사조에 속하며, 그 영향력은 무엇인지 등등의 사회적인 가치와 의미를 따져보는 것에 골몰한다. 양자가 갖고 있는 이러한 차이점은 종종 작가의 작품이 전시회가 갖고 있는 주제의식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든가 또는 전시회가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성을 간과해 버리고마는,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끝나버리기 쉽다. 그렇다면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은 무엇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해 서로에 대한 깊이 있고 진정한 이해만이 이 문제점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해결의 실마리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김종학이라는 작가를 만나 그의 작업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 지를 알게 된 동기는 1995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미술 ’95:질, 량, 감>이라는 전시와 지난 해, 9월 일본 동경국립근대 미술관에서 시작되어 현재 오사까 국립국제미술관으로 순회전시중인 <90年代의 韓國美術로부터 – 等身大의 物語>전시를 기획하면서부터이다. 두 전시 모두 ’90년대 한국현대미술이 안고 있는 본질적 문제의식을 독창적 조형방법으로 실현하고 있는 작가발굴에 초점이 맞춰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의 경우는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큐레이터들에 의해 전시가 기획되었다는 점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에 대해 어떤 사전 지식도 없는, 단지 ’90년대 한국현대미술을 과장됨 없이 바라보고자 했던 – 그 의도는 ‘等身大’라는 전시부제가 암시하고 있다 – 일본 큐레이터에 의해 그의 작품이 주목받았다는 점이다. 거대한 사과나 배, 포도, 새우, 생선을 즐겨 그려내는 이 작가의 그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유추토록 하는 것일까? 김종학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걸어 온 전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3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던 이 작가는 새하얀 캔버스에 인체의 한 부분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일종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작품을 선보였다. ‘가상적 이미지 – 생명력’이라 명명된 일련의 이 작업은 이후 「가상적 이미지-인간의 굴레」라는 연작으로 발전되면서 인간의 한계적 상황, 즉 절망이나 죽음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화면을 만들어 내었다. 마임극같은 연극적 요소를 도입한 것처럼 보이는 당시의 작품들은 마치 한사람의 연극배우가 흰막 뒷편에서 온갖 몸부림을 쳐보지만 도저히 벗어나올 수 없는 덫에 갇혀버렸음을 암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작가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였다. 1989년 김종학은 도불을 결심한다. 자신을 자꾸만 함몰시키는 매너리즘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그는 전혀 다른 환경에 자신을 내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전에 생활하던 환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파리 생활 속에서도 이 작가는 ‘나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또는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나는 무엇을 그릴까?(또는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을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떻게 그릴까?’에 대한 현대미술가에 있어서 숙명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자신에게 되풀이해서 묻고 있었다.
언젠가 이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서양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파리 생활이 시작되면서 유난히 그의 눈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배와는 생김새와 맛이 다른 서양배였다는 것이다. 꼭지 쪽으로 갈수록 좁아지고 반대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면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요철이 더욱 분명한 서양배의 생김새가 그에겐 신선한 시각적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낯선 환경에서의 이와 같은 충격은 사물에 대한 소박하지만 진지한 관찰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그림에 자주 표현되는 커다한 포도송이, 발라먹고 남은 생선가시, 두 마리 오징어, 사과 조각과 같은 소재들은 이렇게 등장하였다. 파리의 골목골목에 붙어 있던 낡은 포스터들을 배접하여 200호, 300호 심지어는 500호까지 확장시킨 새로운 지지체로서의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이 대상물들은 대개의 경우 우리가 예상치 못한 거대한 크기로 확대되어 그려진다. 매끄러운 표면 위에 기계적이고 미니멀적인 표현 방식을 취했던 그의 이전 작업과 비교해 볼 때, 90년대에 그려진 그의 회화작품은 강한 질감을 지닌 바탕 위에 매우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양상을 보여 준다. 이렇듯 완전히 상반된 표현상의 변모에도 불구하고 김종학 작업의 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2차원의 평면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한 화가로서의 신념일 것이다. 그것은 어느 무엇보다도 강한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흰색 바탕 위에 검은색을 주조로 한 단색조로 그려진 대상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포스터에 인쇄된 인물이나 사물 또는 문자의 이미지와 결합시켜 이중적 이미지를 연출한다든가 역시 포스터로 연결된 바탕 면을 부식시킨 커다란 갈색조의 철판처럼 보이도록 채색하고 이를 보강하기 위해 나사와 볼트로 조여주는 것 등 모두가 위에서 언급한 회화적 표현을 인식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종학의 거대한 화면은 35×35×17cm의 작은 나무상자로 분절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도 역시 클로즈업 된 사과와 같은 사물들이 나무 상자의 표면 위에 그려진다. 여기에서 특히 사과의 의미는 그가 그려 낸 모든 사물들의 상징물로서 존재한다. 마치 세잔느가 그의 화실에 놓여 있는 사과를 응시하고 거듭 그려냄으로써 현대회화의 조형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그 경계를 확장시켰듯이 김종학의 사과는 이 작가의 지속적인 문제의식, 즉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회화적 본질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의 결정체로서 자리하고 있다.
김종학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몇몇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이러한 열정적인 노력이 ’9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그의 그림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끔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주제의식과 내용 그리고 형식의 본령에 함께 다가갈 수 있었던 기억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 최은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김홍주
김홍주 그림은 언제 완성되는가?
그것은 전체적 형태 – 즉 꽃이라든가 나뭇잎, 시골풍경 같은 – 속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수하고 미세한 세부 속에서 완성된다. 그것은 이미 항상, 그리고 무수히, 지속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종결되고 있는 진행형의 그림이다.
그가 그리는 모든 세부들이야말로 실은 ‘그림의 마지막 지점’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모든 부분에서 멈추고, 모든 부분에서 동시에 전진한다. 목적과 흐름은 없다. 대신 모든 감각적 세부들의 창궐, 소요가 이 세계의 지배적 풍경이다.
그것은 하나의 명료한 언어나 형태를 향한 매진이 아니라, 현재 속으로의 무한한 침잠이며 쾌락의 추구이다. 여기서 무수한 세부들은 각자가 모두 독립된 회화들이며, 이 무수한 회화적 단편들은 비유기적이고 통합되지 않은 무한한 병렬적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이러한 샹태는 무엇보다도 ‘공허함에 대한 감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덧없음’에 대한 감각 말이다. 따라서 김홍주의 회화는 재현적 기념물을 완성하기 위한 시간의 적절한 투자가 아니라, ‘덧없는 시간 낭비의 과정’으로 정의된다. 김홍주의 그림에서 꽃, 나뭇잎 같은 전체적 형태의 명료함은 단지 우발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그건 가장 중요하지 않은 요소이다.
전체는 오히려 세부들로 구성된 과정의 부수적 결과일 뿐이고, 진정한 목표는 세부들을 통해 이미 복수적으로, 무수히 성취되었다고 봐야 한다.
-김홍주 또는 ‘그림의 적’ 中 김원방(미학, 미술평론)
정광호
정광호 작품의 표리부동함에 대하여
정광호의 작품은 파퓰러 하면서도 온전히 그러하지는 않고, 재현이라는 방법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재현이 본래 가지는 속성에서는 멀어져 있으며, 명백한 조각이면서도 비-조각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 요컨대 그의 작품은 비-장식적 장식성을 가졌으며, 재현이지만 비-재현적 재현이며, 조각이지만 비-조각적 조각인 것이다. 사람의 얼굴 생김에서 사람됨이 일순간에 드러나지는 않듯이, 그의 작품도 물질적 표면이 산출하는 여러 요소들과 그 표면 뒤로 열려진 내부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미술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나 소양이 없는 관객이라도 그의 작품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은 그 잘생긴 얼굴 때문이고, 미술에 일가견이 있는 관객이라도 그의 작품에서 무작정 좋아라 할 수만은 없는 헷갈림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 잘생긴 얼굴이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 거칠게나마 생각해 본 도식적인 체계로서 우리는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이중적인 층위에 대한 조그만 열쇠를 가졌다. 그러한 이중적인 층위는 서로 독립하면서 또 동시에 대응하는 기술(記述) 체계를 이룬다. 정광호 작품의 근본적인 존재 양식은 겉과 속이 다름이다. 한 쪽은 일반화를 지향하지만 다른 한 쪽은 특수화, 개별화를 지향한다.
한 발을 통념적이고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것 속에 담그고 있으면서, 다른 한 발은 그 사물을 언어와 인식 속에서 소화해내기 위한 수사와 분석, 지식 속에 담그고 있다. 많은 경우 작품의 겉과 속이 다를 때 그 목적은 쉽사리 무엇에 대한 역설이나 아이러니, 혹은 뜻밖의 결과를 노리는 것이라 결론지어진다. 그러나 정광호 작품에서 보이는 미묘한 어긋남의 지점이 그러한 목적을 갖는 것은 결코 아닌데, 그것은 그 작품이 가지는 어떤 한 측면이 다른 한 측면을 위해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을 위한 속도 아니고 속을 위한 겉도 아니다. 겉을 볼 때 속이 오버랩 되고 속을 보려할 때 겉이 오버랩 되는 투명∼한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라고 해야할까. 소리와 뜻으로 이루어진 언어처럼, 모든 시각 작품이 이러한 차원을 조금씩 안고 있겠으나, 정광호의 그것은 특별한 조정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보이는 두 측면이 기존의 틀과 그보다 조금 큰 틀을 한 몸에 가지게 되어 그러한 일군이 모여 새로운 정의를 이루게 되는 형국을 그리게 되는 때문이다.
– 이 윤 희
한기창
한국적인 운율을 담고있는 듯한 이미지
<아트스펙트럼 2003> 전시에서 한기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밀도있고 완성된 <뢴트겐의 정원>을 보여준다. 갤러리 전시장 대벽면에 설치된 대형의 라이트박스에서는 온갖 상처와 고통과 절망의 기억을 품고 있는 공포스러운 X-선 사진들이 서로 얽히고, 접합되고, 조립되는 정형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꽃을 피워내고 있다. 그는 버려진 상처들의 흔적은 품에 안고, 정형외과의처럼 뼈와 뼈를 이어주고, 잃어버린 뼈의 자리를 이물질로 대체시키며, 거기에 따뜻한 빛의 에너지를 더해 정교한 생명체를 일궈내는 것이다.
작가는 그 사각 틀의 네 귀퉁이에 빨갛게 염색 처리된 X-선 사진을 넣어 이 치유를 갈망하는 이미지들의 집합체에 다시는 아프지 말라는 소박한 액막이의 부적을 선사했다. 빛을 받아 발광하는 X-선 사진들과 함께 굵은 붓질 자극으로 인해 투박한 목가구를 연상시키는 사각 프레임은 마치 우리 옛 선조들의 방을 장식했던 자개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벽에서 오른쪽으로는 다양한 크기의 둥근 라이트박스들이 설치되었다. 이 둥근 라이트박스에는 좀 더 가볍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들이 담긴다. 단아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 화분 속에 심어진 작고 가녀린 식물과 꽃들, 그 속에 담긴 하나 하나의 기억들과 에피소드들과 함께 작가는 자신이 지금까지 실험해 온 다양한 기법, 형태, 색채등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 한기창은 긴여정을 통해 전통적인 한국화의 재료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X-선 사진과 라이트박스라는 재료를 발견하였다. 그 재료들은 참 낯설면서도 작가의 끈질긴 노동과 능숙한 손놀임에 의해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한 이미지, 그것도 한국적인 운율을 담고 있는 듯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렇게 한기창은 끝없이 새로운 재료를 모색하고 실험하지만 자신의 뿌리인 한국화의 선, 먹의 농담, 그리고 형태 모두를 그 속에서 살려내고 있는 진정한 한국화 작가이다.
– 오승희(삼성 리움미술관 학예사)
Piao Guangxie
Piao Guangxie는 Mono pink 한가지 색으로 모든 사물을 표현하며,연꽃시리즈와 풍자적인 인물작업을 Pink색감의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Moma 미술관과 뉴욕콜렉터들에게 러브콜을 받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활동이 기대되는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