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Illusion – Take Six – 유진갤러리

November Illusion – Take Six

[November Illusion] Take Six

Exhibition Date :  2007.11.22 ~ 2007.12.28

Artists : 김문경, 박선기, 박은정, 박용식, 이지현, 이하린

어디선가 본 듯한 아련한 기억들의 편린이 녹아들어 있어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한 기억들을 형상화된 장면 장면으로 포착한 각기 다른 여섯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진다. 이번 유진갤러리의 11월의 환영(November Illusion)은 2007년 마지막을 환상적으로 장식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김문경

우리는 식물과 고리처럼 얽혀있다. 식물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식탁에 올라오는 식물은 생존과 건강에 필수적인 것들이다. 한 켠에 놓인 화병에 꽂힌 꽃들은 먹을 수는 없지만 음식 이상으로 의미가 있는 존재들이다. 식탁위에 놓인 먹을거리와 볼거리인 식물을 대상으로 해서 그린 정물화의 등장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 아래 가능했다. 신과 천사만을 그리던 이들의 눈에 비로소 식물의 존재가 그 어느 것보다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비로소 서구의 근대/근대미술은 그 정물화의 등장으로부터 서서히 발원한다.
식물은 부동의 자세로 대지에 박혀있다. 그래서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다. 식물은 다른 생물을 잡아먹지 않는 대신 빛과 공기, 물과 광물질로 살아간다. 그러니까 그들은 해를 먹는다. 식물은 자신의 몸으로 물과 토양과 햇빛을 귀중한 물질로 탈바꿈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녹색이어야만 한다.
지구의 표면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이 녹색은 인간의 눈에 가장 편하게 다가오는 색이자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는 색이며 무엇보다도 아름다움과 미적 쾌감, 숭고를 자아내는 색이기도 하다. 그만큼 식물은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사물이다.
일상에서 매일 접하는 이 과일, 야채는 미각, 시각, 후각과 촉각 등을 자극하는 대상이자 인간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구체적인 매개이기도 하다. 오늘날도 그토록 많은 화가들이 꽃과 식물을 그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식물이 미술의 핵심적 대상이 된 것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의 등장이며 이후 세잔의 분석적 사과, 고흐의 자전적 해바라기, 오키프의 여성적 자의식으로서의 꽃, 볼테르의 초현실적인 서양 배, 메이플 소프의 관능적인 백합 등으로 나아간다. 그런가하면 동양의 경우 식물이란 대상은 인간이 지닌 동물성을 중화시키고 군자가 지향하는 식물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징표로 반복되어왔다. 이렇듯 식물은 다른 생물체의 욕망을 자극하고 충족하면서 이들을 유혹한다. 그것이 식물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동시에 인간의 미적 욕망, 존재의 지향성으로 지속해서 자리해왔다.
우리들 일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이 식물이란 대상을 왜곡, 변형해서 커다랗게 만들어낸 김경문의 작업은 일종의 의사자연, 의사식물이다. 작가는 낯익은 과일을 매우 낯설게 만들었고 그것들은 도예용 흙으로 빚어 구워낸 것들이다.
흙과 불이 만나 이룬 기이한 자연/식물의 세계인 셈이다. 일상의 사물을 재현하는 경향은 팝아트 이후 현대도예나 조각에서 일반화되어왔다. 그러니까 자코모 만주나 올덴버그, 조지 시걸 등의 타블로 조각에서 보듯 실물모형으로 구성된 작품주변을 돌아다니는 체험을 통해 관람자의 세계와 작품 환경이 연속적이라는 느낌을 강화하는 한편 일상적 사물을 변형하는 여러 장치들이 김문경의 작업에서도 반복된다.
작가가 만든 식물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식물들을 닮은 물체를 통해 새삼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세계를 다시 보게 한다. 초현실주의 작품에서는 현실세계의 지속적 바탕에 균열을 열어놓기 위해서 크기를 극단적으로 전도시키는 방법이 사용된다. 작가의 이 크기 감각 역시 초현실주의적 원천과 관련되어 있다. 김문경의 경우는 자아에 영향을 끼치는 사물 세계의 힘과 영향, 충격 등을 표현하기 위한 전도로 다가온다. 식물은 일련의 변형과정을 거쳐 크기가 커지거나 길이가 늘어나는가 하면 속이 절개되고 그 안에 다른 것들이 개입되어 있다. 의인화된 식물이자 상징과 은유체로 설정되어 있다.
눈속임을 불러일으키는 이 과일과 야채는 외형은 유사하지만 먹을 수 없고 냄새나 촉각이 다른 기이한 존재가 되었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의사식물을 빌어 존재와 거짓존재,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 어려운 동시대의 가치관을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다. 겉으로는 매끈하고 보기 좋고 탐스러운 과일이지만 순간 흙으로 빚어 구워낸 딱딱하고 먹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당혹스럽고 낯설 것이다. 그것들은 분명 과일로 존재하지만 분명 거짓이고 허상에 불과하다.
사실 모든 이미지는 허상이다.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허상을 빌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미술의 운명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허상을 적극 작업의 주제로 추인하고 있다.돌이켜보면 과일과 야채는 현재 자신이 보고 있는 순간은 일정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본래 아주 작은 씨앗이고 캄캄함 흙 속에서 물과 햇살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환한 것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썩고 메마르고 퇴색하면서 끝내 가루가 되고 즙이 되어 다시 흙 속으로 들어갈 것들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당연히 인간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러나 김문경이 만든 과일과 야채들은 결코 썩거나 죽을 수 없다. 시간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져서 영원성과 불멸 속에서 자리한다. 썩어서 없어질 과일들을 도자기로 만들어 박제화 시켰기 때문이다. 일정한 시간성의 지배를 받는 생명체를 흙으로 빚어 만든 후 불에 구워내 썩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허상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거짓을 반영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허상, 박제의 의사자연을 일상의 공간에 다른 사물과 함께 섞어서 그 허상성을 적극 연출한다. 일상의 다른 사물과 함께 엉켜서 자존하는 이 과일과 야채들은 마치 인간 존재처럼 방과 공간, 계단과 책상, 테이블에 앉아있거나 드러눕거나 걸터앉아있다. 의인화 된 식물의 세계상을 만나고 있다는 착가도 드는 연극적 공간이다. 더욱이 그런 일루젼을 더욱 증폭하는 요소는 벽에 걸린 사진인데 그것들은 책꽂이나 실제 과일을 촬영한 것이다. 이미 그것 역시도 사진으로 재현된 허상이고 거짓된 이미지다. 벽에 걸린 사진을 배경으로 커다랗게 부푼 과일들이 놓여져 있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은 존재와 허상에 대한 혼란을 주면서 과연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은 진실 된 것인가 거짓된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그러니까 허상화를 통해 거짓된 현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수많은 거짓과 진실의 커다란 대립적 구조가 공존하고 있고 그러한 것들은 익숙한 사물과 언어, 행동 등에 의해 실제의 존재가 가려지고 허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각 자신의 메시지를 구현하고 있는 이 의인화된 식물, 과장되고 초현실적인 식물의 세계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흥미로우면서도 기괴하다. 마치 우리네 삶의 풍경이 그러하듯 말이다.
– 박영택

박선기

밀라노의 갤러리 로렌스 루빈에서 6년째 전속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
94년 중앙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밀라노의 국립 미술원으로 유학을 떠나 박선기는, 밀라노를 비롯한 유럽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97년부터 갤러리 로렌스루빈의 전속작가가 되었으며, 화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작가는 개인전은 물론이고 여러 국제 아트페어에 활발하게 참석하고 있다.
현재는, 포르투칼의 아르테 마니페스토 화랑에서 11월1일까지 개인전이 있다.
내년에는 활동무대를 미국까지 확장시켜 워싱턴, 뉴욕, LA등지에서 개인전을 연다.
동시에 마드리드 아트페어, 바로셀로나 아트페어, 리스본 아트페어, 상하이 아트페어에 참여하기로 하는등 작가는 부지런히 작업하면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물질적 정신적 연관성에 의한 중간자적 본질 문제 제시
원만한 대인관계, 평화로운 환경 그리고 안정된 삶에 대한 욕구는 만인의 소망이고 또한 행복의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는 그게 아닌 듯 하다. 완성을 향해서 자기의 세계를 찾아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고행하는 과정이 곧 예술의 진수요 꼬 드것이 비록 미완성일지라도 우리는 예술이라는 말로 음미하게 되는것이라 생각한다.
미술이 시각을 벗어나고 그 중요성이 100%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과 더불어 개념, 정신, 과정등이 한구석을 확보해 가는 시대적 조류에서 시대 표현적 존재인 현대미술은 이제 개인 사고의 비중에 따라 어느 한 분류로 구분되어 질 수 있다. 현시대의 다원주의적 경향에 나타나듯이 아직 이 시대를 이끌어 나갈 명백한 주류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미술은 표류하고 있다. 데카당스, 키치, 포스트 모더니즘 등이 모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발전인지, 알 수 없는 혼미한 현 상황, 물론 후시대 미술사가들은 이 시대가 어떠했는가를 명백히 기록 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여건이 주어진 상황에서 나 자신이 갖추어 사고해야 할 것들, 죽 미술이 가져야할 본질적 분제와 진보적 경향을 포함하고, 이러한 범주 안에서 나의 사고와 개념이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이 어려운 게 한두 해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륜이 쌓일수록 더더욱 어려워짐은, 미술이 가지는 특질이요, 본질적인 문제를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리라.
젊은 세대에 속하는 나는 무엇보다 냉정한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로 작업하길 원한다. 감성에 의존하는 작업은 좀 더 후일, 나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무래도 논리적으로 나타나는 합리적인 사고로 설명될 수 있는 작업에 기존하여 이끌어 가고 싶고, 과학적인 것처럼 체계적인 다음, 좀 더 자연적인 구상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물론 이문 제는 후일, 이성과 합리적인 작업후가 될 것이다.
예술은 나에게 있어 수없이 많은 사고의 표현이다. 그것이 아름답든 추하든, 현태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며 내 사고의 본질이 얼마나 깊이 있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고 최대한 사고에 근접한 작품이 나오길 빈다.
또한 나의 작품들이 어떠한 소재들이 사용되었던지 간에 물질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해치지 않으면서 나의 사고와 느낌을 절충한다.
이러한 개념과 관객사이에서 나의 작품은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고 과거, 나의 삶의 개념과 일상생활을 통한 물질문명사회의 느낌을 제시하는 입장에서 표현해낸다.

박용식

의인화된 동물들은 인간의 잘못을 꼬집거나 좋지 않은 행태를 ‘꾸짖기’ 위해서 동화나 만화, 우화에 등장한다. 인간의 세상을 판박이 한 그들의 세계에는 인간 활동의 룰이 그대로 적용되어 인간과 같은 논리를 펴면서 나쁜 편, 착한 편이 나오고 싸우고 착한 편이 주장하는 정의가 승리한다. 이솝 우화도 그렇고 라이언 킹도 그렇고 개구리 왕눈이도 그렇다. 또한 동화, 만화에 인간과 같이 등장하는 동물들은 인간보다 혹은 인간만큼 똑똑함을 자랑한다.
월레스와 그로밋의 개, 가제트 형사의 개, 땡땡의 모험에 나오는 인간의 친구인 개들은 주인이 좀 덜 떨어진 모양새를 하고 벌어진 사건을 엉뚱하게 뒤 쫓을 때 때로는 주인보다 더 똑똑하게 악당을 물리치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한 몫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물 캐릭터들은 어떻게든 인간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인간사를 대표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사건의 서술에 동참한다.
박용식의 개와 쥐와 오리와 고양이는 인간의 활동과 연관이 있지도 인간과 주종관계에 있지도 인간과 공생의 관계에 있지도 인간의 머리 꼭대기에 있지도 않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만의 리그 안에 존재한다. 쥐와 개는 꼬리를 늘어뜨리며 꽃을 피우고, 오리는 세수 대야를 타고 바다 가에 앉아 있고, 고양이 발바닥을 한 개는 날개를 달고 뒤태를 보이며 떠간다.
그들은 상징적인 액션을 취하고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러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서술의 잡음 없이 어떠한 선상에 있는 그들의 세계는 사건의 상태, 고요함의 상태, 정지된 움직임의 상태 내에 존재한다. 그들이 갖고 있을지도 모를 서사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억지스럽게 이야기를 끼워 맞출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 그들은 너무나 정적과 조화롭다.
박용식이 만들어 낸 그들은 형태의 귀여움과 사이즈의 아기자기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순수하지 만은 않음과 비장함과 패러독스를 사랑한다. 그들은 ‘동네평화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고, 골리앗을 이기기 위한 작전 회의도 주최하며, 선상비행을 하며, 호시탐탐 삼자대면을 하는가 하면 한가로운 이곳에 이렇게 등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의인화 되어있으나 인간의 룰을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고, 캐릭터라고 하기엔 그 위용이 장엄하고 고독하다.
제다이 포즈를 하고 근엄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쥐와 굵은 털 목도리를 두르고 배가 나온 채 책 위에 서 있는 고양이과 물 위에 자연히 뜰 수 있으나 고무 대야를 타고 있는 오리와 날개 달린 개는 어디서 왔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떠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 김윤경

박은정

산해경(山海經) -(액자에 들어있는 작품), 재료: porcelain
매스미디어와 첨단 과학의 발전으로 세계화(globalize) 되어가는 시대에 모호해져 가는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산해경”은 우리의 신화속으로의 여행이다. 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을 통해 만난 전설속의 인물들, 동물들, 사물들은 모든 것이 변화하고 순환하는 과정에 있다는 시간관념과 생명을 가진 것들은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는 채 다른 형태로 변할 수 있다는 영혼불멸사상에서 탄생하였다.
인간과 모든 자연이 동등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고대 이후 현대에 이르러 재조명 되고 있다.
첨단과학의 발전과 유전공학으로 산해경 속의 인물, 사물들은 우리의 조상일 수도 우리의 모습일 수도 진화된 우리 미래의 후손일 수도 있다.
Buddleja, 황화충도(黃花蟲圖), 재료:porcelain
여러 가지 자연물들을 캐스팅하고 조합하여 상상속의 식물과 전경을 표현하였다.
자연을 지배하려는 서양의 사고방식으로 인류의 문명과 기술이 발달하였지만 거기에는 많은 부작용들이 있었다.
하지만 동양적 사고로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서로 조화로운 관계로 파악된다. 예로부터 우리는 天地人 三才라고 하는’하늘과 땅과 인간은 하나이다’라는 사상으로 자연과 우주 안에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종 서화,
예를 들면 풍경화나 산수화에서의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자이기 보다는 거대한 자연의 일부, 혹은 자연 그 자체로 묘사되고 있다.
인간이 주인이 되고 자연은 그저 정복의 대상Object화하여 인간에서 자연으로 일방적 소통의 관계, 혹은 자연으로부터의 도피보다 우리에게는 인간과 자연과의 양방향 소통 및 융합의 관계가 훨씬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나의 작품에는 자연물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자연과 자연물로 만들어진 인공물이 공존한다.
이 작품에서 저는 제 문화의 근간인 한국의 산수화에서 영감을 받고 현재의 저의 문화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자연으로의 도피라는 우리 궁극의 문명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 작가노트 중에서

이지현

‘책, 이미지-뜯다’
어릴 적 시골 마을 도랑에 죽은 토끼의 사체를 보았다. 흐트러짐 없이 마치 고이 잠들어 있는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부패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충격과 흥미 그리고 호기심이 어린마음에 한동안 그곳으로 발길가게 했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의 오래된 서재는 항상 조심스러웠다. 누렇게 변하다 못해 갈색끼 마저 도는 아버지의 수많은 책들은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내 앞에 특별한 물질로 기억되어 자리 잡고 있다. 내용은 둘째 치고 긴 시간을 고이 머금고 있는 책들은 마치 평생을 침묵 속에 살아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엿 보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난 유년을 보냈다.
내 작업의 시작은 이렇게 몇 가지 기억과 추억이 단서가 되어 자리하고 있다.
우리시대는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혼재된 가운데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수용되어 지는 것이 현실이다. 혼재된 문화의 결과물이기도 한 자아의 정체성과 시대적 모호성은 또 다른 관점에서 이 시대를 이해하고 설명되어지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본인 작업의 최대 관심은 바로 우리시대 정체성이다. 자신과 우리 사회에 대한 모습이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그 답을 조금이라도 얻고자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또 다른 관심의 하나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 접근이다. 가급적 기존에 시도되지 않은 방법에 대한 고민이다. 뜯는 행위는 내가 아는 한 일정부분 그 답을 주고 있다.
책은 전하는 내용이 사실이든 허구든 시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일순간도 놓쳐서는 안 될 역사의 흐름을 빼곡히 기록한 책도 있는 반면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화려하게 포장되어 나온 책도 있다. 내용은 달라도 그 시대의 스토리를 일정부분 옮겨 놓은 장소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국어, 국사, 도덕 같은 교과서로 작업을 시작했다. 근래에 와서 본인과 비슷한 시기의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6,70년대 서적을 주로 사용하고 있고, 더불어 성경, 악보, 사전 그리고 오래된 잡지 등도 자주 사용한다.
현대회화는 새로움을 넘어 파괴란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그리지 않았다 라는 의미는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다. 내 작업은 그리지 않았다. 단지 노동이란 전통적 회화의 용광로 속에 용해시켜 다시 끄집어내어 보인다. 노동은 작업을 풀어 가는데 여전히 중심에 서 있고 부인 할레야 부인 할 수 없는 본인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읽혀지고 있다. 작품에서 한 땀 한 땀 해체하듯 뜯어내는 행위야말로 대상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행위고 이는 바로 손에 의해 대상이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뜯는다는 것은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이다. 지극히 개인적 행위의 기록일 수 있다. 그리기를 거부함으로 이제까지 감춰진 이면의 모습과, 뜯겨짐으로 인한 공간 속에 부유 하는듯한 이미지는 곧 자아를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과 마치 자리 잡지 못한 수많은 우리시대의 단상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 작가노트 중에서

이하린

오묘한 인간의 감정을 언어나 이미지로 온전히 전달하는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질투와 욕망, 그리고 편안함과 행복함이 있는가 하면 절망과 고통스러운 감정도 짧지않은 우리의 생을 교차하고 가로지른다. 영혼을 울리고 맑은 종소리를 내기도 하고 파도처럼 거세게 몰아치기도 한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는 도예작가 이하린의 작품에는 이러한 형언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 펼쳐진다. 인간의 감정중에서도 ‘사랑’ 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드라마의 보편적인 주제는 작가의 작품에서 큰 맥을 차지하고 있다. 죽음과도 같은 사랑이 있는가 하면 온유한 사랑도 있을것이고 그런가 하면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는 사람도 있고 용납하지 못할 사랑에 괴로운 사람도 있다. 작가의 작품을 장식하는 나비와 꽃들은 탐욕스럽거나 순수하거나 그러한 사람과 욕망을 환유하고 이 환유는 섬찟하도록 강렬하게 시각을 자극한다. 이는 푸르스름한 백색의 차가운 질감과 어우러지고 무언가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와 함께 기묘한 느낌을 발산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아름다움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작품들이 한눈에 찬탄을 자아낼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들에서 인물들은 죽음과 삶, 남성과 여성,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어느 한쪽이 아닌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형상을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음산하며 괴이하게 보이기도 하는 인물들의 형상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시각이 가질 수 있는 극치의 신비한 미감을 포착해 내고자 한다.
독소와도 같이 강렬한 붉은 빛은 이의 정점을 보여준다. 머리위에 솟아난 빨간 버섯이나 뿔이라든지, 인물의 입술에서 아무렇게나 번지거나 머문 붉은 빛은 시리도록 푸른 백색의 매끄러운 살갗위에서 치명적인 조화를 이룬다.
흑단처럼 검은 빛 위에 푸르스름하게 흰 인물이 두 손에 잡고 입술에 물고 있는 붉은 종이는 옛날 립스틱 대용으로 여인들이입술을 붉게 물들일때 사용했던 연지구이다. 그가 인물의 입술을 이토록 붉은 색채로 채색하고 화장한 모습, 그리고 화장하는 장면의 표현, 혹은 극도로 장식된 머리모양을 표현해 낸 것은 인간이 치장을 한다는 것은 아름답고자 하는 욕구이며 이는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강한 미의 열망과 더불어 사랑을 하는 이의 설레임으로 가득히 담은 것이다. 자연 그대로가 아닌 인공미, 인간의 힘으로 다듬어진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며 또한 인간 내면의 욕구를 내포한 것이다.
흙과 물이 고온의 불과 만나 뜨거운 불길을 모두 받아들이고 푸르스름한 비색을 머금은 백색의 결정체로 다시 채어났다. 이 결정체는 작가의 손길로 치장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과 인공의 합일이다. 그의 도예작품은 인간과 그가 가진 창조의 힘, 그리고 사랑의 예찬이며 예술의 예찬이다. 원초적 아름다움을 다듬는 이 힘은 불길 속에서 심연의 혼을 끌어올리는 소산이다.
윌리엄 모리스는 패턴으로 생겨난 장식성이 총체적 예술을 낳는 근원이고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는 모티브라고 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구스타브 클림트의 아르누보를 모티브로 하는 화려한 식물의 장식이나 화폭에 펼쳐지는 현란한 금박과 은박이 보는 이를 사로잡으며 다가오듯, 작가는 윌리엄 모리스의 패턴과 클림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금색 창연한 장식을 다름 아닌 그토록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다시 태어난 도예작품에 입힌다. 탐닉과 퇴폐, 쾌락과 그 파멸도 시리도록 차가운 색채 위에 머금은 미소는 말해주고 있다.
클림트 미술의 핵심 주제가 여성이었다면 이하린작가의 그것은 바로 인간 자체의 내면에 대한 탐구다. 발갛게 볼을 불들인 소년의 소침한 모습의 가슴에는 잉글랜드 십자가가 선연하다. 얼굴을 붉히는 소년은 그의 후면에 화려한 꽃다발을 숨긴것을 차마 온전히 감추지는 못한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갈등과 이중성은 그의 작품들에서 구슬이나 점, 구멍들로 표현되기도 한다. 방황하고 번뇌하는 인간의 내면이 몽글거리며 목덜미를 감고 온몸에 점점이 맺히기도 한다.
2003년작 ‘Brothers’는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와 악마의 얼굴을 한 가진 천사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과 그에 대한 도발은 희화된 형상으로 보는 이들에게 유추의 과제를 던진다. 애증과 애욕은 붙어 있는 두 인물에 의지하는 모습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한 인간의 그의 삶에서 지나치고 만나고 또 헤어지는 인연과 숙명적인 드라마도 의인화된다.
고개를 갸웃한 인물은 어느 사이엔가 슬며시 그의 안에 들어왔다가 그를 돌아보며 안타까이 그에게서 벗어나고 있는 인연을 아는 듯 모르는듯, 꽃송이들은 또 다른 인연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독일의 공예잡지인 Kunsthandwerk&design 의 표지에 실렸던 작품인 LOVERS 에서 남성과 여성의 눈길은 작가가 그의 작품이 인간의 통속적인 사랑 이랴기를 그린다는것을 넌지시 표출한다.남성의 얼굴이 순진하고 머뭇거리는 표정이라면 여성의 모습은 도도하고 차갑게 보일 수도 있다. 작가는 남성이 손가락을 굽혀 여성의 가슴을 ‘슥’ 문지른다고 묘사했는데 어떻게 보면 오히려 남성이 도도함을 감추고 부드러운 눈길로 여인을 유혹하는 모습일수도 있다. 꽃송이나 나비가 그러하듯이. 여인의 몸에 그려진 꽃들과는 대조적으로 남성의 머리부터 몸으로 꽃들은 흐느적거리면서 꿈틀대는 형상이다.
그의 작품이 현혹적인 아름다움으로 관자를 단번에 사로잡아버리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면 작품이 발산하는 메타포들은 그들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옭아맨다. 좋은 작품은 그것을 감상하는 이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거미줄에 걸려든 나방은 바로 관자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에는 열쇠가 없다. 다만 암시가 있을뿐. 인생과 사랑이 그러하듯 예술에도 정답은 없다. 그의 작품들이 의미하는 바를 유추하는것은 앞서도 언급했듯 관자의 몫이다. 눈물을 간직하고 바라보면 비애가 비춰질테이고 애정으로 충만할때는 꽃잎 휘날리는 봄날처럼 보일것이다. 그러는 사이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작가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화해하는 아기자기한 삶의 이야기는 삶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인간의 삶은 무수한 인연과 갈등과 고통속에도 사랑의 샘에서 길어올리는 정겨운 샘물로 촉촉하고 따사로워지는것이다. 차가운 도예의 질감과 인공의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작가의 작품은 거듭하여 상반된 두 가치의 할일을 강조한다.
이하린 작가의 작품이 수많은 흙중에서 고른 흙과 이를 얻고자하는 작품을 위해 몇번을 굽고 구워 타오르는 불길보다 뜨겁고 치열한 열정으로 녹아내렸지만 이제는 시리도록 하얀모습으로 유혹하면서 그 안에 따뜻하게 고여있는 내밀한 감성이 숨어있는것은 고통과 희망은 공존한다는 엄연한 진리와 그에 숙연해질수 밖에 없는 인가, 그리고 그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그대로 비춰진 연유일 것이다.
– 김성은 미술평론가

2019-01-11T07:36:3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