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nd New 4 – 유진갤러리

Brand New 4

[Brand New 4] Best of Breed

Exhibition Date :  2010.07.06 ~ 2010.07.30

Artists : 고선경, 김석, 김현정, 박종영, 빈우혁, 윤현선, 최지영, 황현승

유진 갤러리의 “Brand New” 전시가 올해로 4번째를 맞이한다. 매년 새로운 작가를 소개해온 Brand New전시는 그 동안 소개된 작품들이 세상에 빛을 발하면서 그 가치를 높게 인정 받으며 전시 후 작가들의 국/내외 다양한 활동들로 명망이 오르면서 본 전시가 역량 있는 작가들의 발굴과 소개의 장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Brand New 이번 부제는 “Best of Breed (최고들의 조합)” 으로 말 그대로 작가와 작품의 선정에 특별히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창발성(emergence)개별의 요소적 특성들이 그룹을 이루면서 개체 수준에서 볼 수 없었던 미적 에너지와 심미적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조합으로 각기 다른 분야에서 앞으로 최고가 될 작품들을 소개한다.

고선경

Alice in Nostalgia. 작가 고선경이 자신의 근작에 부친 이 주제는 향수에 빠진 앨리스를 뜻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녀는 열려진 공간과 실내 정경을 배경으로 그 속을 기웃거리거나 서성이고 있다. 소녀 앨리스가 자신의 향수의 근원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녀는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존재가 유래한 뿌리, 근원, 원형을 찾고 있으며, 진정 자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의 십우도에서 소로 비유되는 인간의 본성, 소승불교에서의 진아, 프로이드의 리비도(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추동되는 무의식)와 실존주의의 자기소외(실존적 타자로서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끼는 경험)는 모두 이 실체에 대한 자의식과 연동돼 있다. 일종의 원형의식에 의해 추동되는 이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자질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림 속 소녀는 작가의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는 진작부터 자신을 앨리스와 동일시해왔다. (2006)와 (2007)에 이어 근작에서의 (2009)에 이르기까지. 앨리스를 자신의 분신, 얼터에고, 도플갱어, 아바타로 내세우면서 앨리스와 더불어 이상한 나라와 거울나라를 여행하기도 하고(루이스 캐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함께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집필하기도 했다), 앨리스를 낯선 섬에다 고립시키기도 하고, 향수에 빠져들게도 한다. . 사실 인간은 의식과 몸을 분리해서 의식을 멀리 떠나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분열은 인간의 보편적 자질이기도 하다. 굳이 따지자면 유독 예술가들이 그 보편적 자질을 의식의 층위로 끄집어 올려 특수한 경험과 비전을 예시해주는 도구로써 전용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앨리스가 여행하는 또 다른 이상한 나라인 영화 <향수>를 만든 타르코프스키는 철학자이자 영상시인으로 수식되는 러시아 출신의 영화감독으로서, 영화가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을 복원해주는 가장 강력한 매체임을 증명해 보인다. 시간과 기억을 복원해준다 이야말로 주체가 자기의 존재가 유래한 근원을 찾고, 추적하고, 되새김질하면서 행하는 일이 아닌가. 역사적 사실과 존재론적 사실, 역사적 트라우마와 존재론적 트라우마를 날실과 씨실삼아 직조해내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 마침내 거대한 원형의식에 맞닥트리게 하는 그의 영상문법은 그대로 무의식의 여정을 위한 훌륭한 텍스트가 되어준다. 타지가 덧붙여져서 무의식을 왜곡하고 각색하는 것을 상징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의식에 대한 기억의 불완전한 복원력과 재생력을 상징한다. 그리고 거울 이미지는 앨리스가 또 다른 앨리스를 만나는 것에서, 자아가 또 다른 자아(타자)와 대면하는 것에서 극적상황이 연출된다. 나아가 앨리스가 여러 명의 앨리스로 분열되는 것에서, 자아가 허다한 다른 자아들로 분화되는 것에서 캐럴의 이상한 거울나라의 비전은 마침내 완성된다. 비전, 판타지, 꿈, 무의식,마침내 행복하고 자족적인 카오스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 것일까.

김석

경계에 선 로봇들, 정체성의 물음을 던지다
로봇은 철학과 과학, 예술 등 사회 담론의 여러 분야에서 흥미롭게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이다. 첨단 과학은 오래지 않아 정서, 지능, 감각처럼 인간적 요소를 갖춘 고차원 로봇을 만들어낼 것이다. 인간 육체 역시 의학과 과학의 힘을 빌어 신체나 장기를 고기능 대체물로 갈아끼울 날이 멀지 않았다. 로봇과 인간이 점차 닮아가게 될 현실을 앞두고 로봇/사이보그/안드로이드 등과 인간, 둘 사이의 정체성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김석의 로봇들은 소재와 주제 양 측면에서 인간과 로봇의 경계, 교차 지점을 다룬다. 우선 만화, 애니메이션이 갖는 환타지적 비현실, 로봇의 정체성이라는 현실 사이의 경계가 두드러진다. 태권브이, 마징가Z, 건담은 인간 능력을 훨씬 뛰어 넘는다. 하늘을 날아 로켓주먹을 쏘고, 악의 힘을 물리치는 일은 한계를 초월하고픈 인간의 욕망을 대리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훨씬 우월하지만 인간을 모방하여 인간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로봇은 항상 인간 아래 있어야 한다. 환상적인 능력을 갖지만 인간의 명령체계에 복종하는 것, 로봇의 현재적 위상이다.
그는 영웅적, 초월적 능력의 대리만족물이라는 원래적 정체성 이면의 또 다른 정체성에 주목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태권브이 연작, 말탄 중세 기사 로봇 등은 구세를 위해 희생하는 고독한 영웅이라는 오랜 신화적 주제의 변주이다. 희생은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가능한, 오직 인간에 속한 영역이다. 손상된 팔을 안고 슬퍼하는 로봇은 연민과 고독감에 빠져 있다. 아기를 안은 성모 혹은 피에타 상을 떠올리게 하는 로봇의 자세는 희생을 홀로 감당하는 영웅의 고독감을 배가시킨다. 슬픔, 고독, 외로움은 기억과 정서를 토대로 하는 인간만의 감정이다. 로봇이 인간고유의 가치를 나눠가질 때, 둘 사이를 나누는 금은 어디에 그을 것인가. 감정은 편리를 위해 제작된 도구, 로봇이 감히 탐해서는 안 될 금단의 열매일지도 모른다. 자기정체성이 소거된 존재들의 정체성 자문이야말로 그의 작품 배면에 깔린 슬픔의 원천이다.
경계에 선 로봇들의 물음은 그가 매질로 사용하는 소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로봇은 레디메이드를 특징으로 한다. 공장에서 동일한 것을 대량생산해야만 필요할 때 교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재 역시 신소재나 고기능 합금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김석의 로봇은 잣나무의 거친 질감을 살려 수작업으로 깎은 유일한 것들이다. 로봇은 아무 때나 교체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나아가 감정과 기억도 있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표면에 입힌 크레파스나 니스의 질감도 나무의 투박한 결과 어울려 자연성을 강조한다.
2, 30대 성인들이 로봇에 열광하는 것은 일면 경쟁적 삶에 지친 현대인의 키덜트적 욕망 을 반영한다. 정글 같은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불안과 피로를 잠시나마 어린 시절에 행복을 주었던 소재로 달래려는 마음일 것이다. 일견 가벼워 보이는 그들의 퇴행 욕망 속으로 삭막한 경쟁사회에 지친 어른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울린다. 가벼움으로 무거움을 버텨나가는 일, 키덜트적 가벼움에는 어깨를 짓누르는 삶에서 잠시 한숨 돌리려는 사회인들의 무겁고도 서글픈 생존전략이 깍지를 끼고 있다. 키덜트 욕망을 겨냥한 상업자본주의의 가벼움은 위험한 지뢰가 될 수도, 유연한 도약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뢰를 피하며 정체성을 확장시켜가는 것, 양자의 균형감각에도 그가 사랑하는 로봇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
– 박선영

김현정

나의 그림은 풍경이다. 그 풍경은 특별한 대상이나 상황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되어 나에게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그 감정에 몰입된 순간 보통의 풍경은 현실보다 더 생생한 장면으로 연출된다. 나는 그 장면을 붙잡아 마치 원래 그런 것처럼 실재적으로 묘사한다. 그 풍경에 나의 감정이 이입되면서 그것을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커지게 된다. 그것은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디테일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보고 그리는 행위는 내가 보고자하는 방식대로 그리는 행위가 된다.

나는 대상을 나의 감정처럼 실재적인 것으로 재현하기 위해서 그것의 물질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느끼는 실재의 상상적 질감을 그리는 것이다. 대상의 색은 표면의 색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차오르는 색이고 여러 얇은 겹으로 그려진다. 반복해서 그리는 행위를 통해 대상은 평면 위에서 그 자체의 깊이와 밀도를 갖게 된다. 그림이 그려질수록 감정 이입된 대상들이 화면 안에 실제와 다른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은 나의 감정만큼이나 이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나에게 가장 진실한 순간을 드러낸다.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세계를 순수하고 섬세하게 복합적으로 관찰하는 태도이다. 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만 그것은 대상 자체에 대한 설명이나 나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그리는 나의 행위들이 내가 나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만들어내는지를 풍경 안에 담는 것이다.
– 작가노트 중에서

박종영

박종영의 작업은 일단 목조각으로 분류된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요즘 젊은 조각가들 중 직조를 접하기 어려운 현실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자체만으로 신선해 보인다. 좀 유별나다 싶지만, 현재 극사실주의와 팝코드의 경향이 지배적인 트렌드로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작업 역시 일면적으론 그 트렌드에 부응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작업은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목조각이나 직조의 경향성과는 사뭇 다른데, 인형이 그렇게 다른 인상의 원인이다. 인체를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선 정통적인 형상조각과 일맥상통하지만, 작가가 재현해보인 인체는 인간보다는 인형에 가깝고, 자연인보다는 마네킹에 가깝다.
일종의 인간의 대리물에 해당하는 이 인형들은 인간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인간의 이상(이를테면 날개로 표상된)에 대해 말하면서, 억압되고 좌절된 욕망과, 때론 성적 판타지에 연루된 금기와 터부와 죄의식(가면 같은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춰진)에 대해서 말한다. 인간의 논리로 생각하는가 하면(사실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동시에 사물의 생리(페티쉬 즉 인간의 욕망에 복무하는 물건으로 나타난), 기계의 생리(반복재생동작으로 나타난, 입력된 정보대로, 그 정보의 질량만큼 반응하는 인형은 일종의 기계장치다), 가면의 생리(얼굴이 곧 가면인, 웃음마저 무표정한)를 드러낸다. 무표정할 때 인형은 더 인형다운데, 심지어 인공안구마저 없는, 무표정한 가면 뒤쪽에 심연을 숨기고 있는 검게 뚫린 구멍에서 인형의 인형다움은 극대화되고 완성된다. 인형은 얼굴이 없는 만큼 표정도 없다. 그들은 가면으로, 무표정으로, 침묵으로, 의식 저편의 무의식으로,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언어의 질료로 말을 한다.
박종영은 인형 중에서도 특히 구체관절인형을 만들고, 마리오네트를 만든다. 사실은 이 두 인형이 하나로 합체된 경우로 보인다. 엄밀하게 구체관절인형은 구체(원형)가 관절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작가의 작업에서는 그 변형된 형태가 관절을 위한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런 관절의 도움으로 인형은 손과 발, 손목과 발목, 그리고 무릎과 목을 움직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구체관절인형은 초현실주의자 한스 벨머에 의해 성적 판타지와 결합된 바 있다. 초현실주의자에게 성적 메타포는 초현실적 비전을 여는 중요한 계기로 여겨졌으며, 더욱이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그 크기나 형태가 영락없는 사람의 실제를 빼닮았을 때 일정정도의 성적 암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작가가 이 인형을 만들면서 성적 암시를 생각했는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그 이면에 무의식적 욕망이 녹아들어있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혹, 그 욕망이야말로 인형이 스스로 일궈낸 혼이며 생명이지 않을까(인간은 결코 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가 없다). 작가의 작업에서 관객들은 인형과 함께 세팅된 스위치를 조작해 그 인형들을 직접 움직일 수 있지만, 그럼으로써 그 인형들에 관한한 마치 신과도 같은 전지전능한 권력을 체험할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마치 인형극에 초대된 관객들이 그런 것처럼 정작 인형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식을 간섭하는 무의식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현실을 가동하는 제도와 시스템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현실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나의 의지가 담겨진 신의 밑그림을 보지 못한다.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적어도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처럼 불가능한 욕망, 왜곡된 욕망 탓에 인형들은 심지어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기조차 한다. 사실 그로테스크하다는 것은 인형의 본질이며 본성이다. 인간을 닮았지만, 그 무표정한 가면 뒤에 인간의 억압된 욕망, 왜곡된 욕망, 좌절된 욕망, 불가능한 욕망, 실패가 예정된 욕망이 그림자처럼 포개져 있기 때문이다. 인형은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표정하고 우울하고 낯설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빈우혁

어떻게 하기에 왜 늘 같은 형식으로 그림을 그리는가 하고 의문을 갖는다. 이를테면, 표현하는 방법이 고착화 된다거나 특정 주제를 의식적으로 탈피하려고 하지 않는 것 등을 주로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의문은, 같은 형식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것을 동경하거나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과 그림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그림은 매 순간마다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 혹은 반발심으로부터 기인한다. 여전히 일정한 것을 작가가 아닌 타인의 간접적인 노동이나 직접적인 어시스트 등을 통해 생산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무한 반복되는 이미지에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새로운 철학이 깃들어 있을 수는 있는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자기복제를 반복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답답함은 가시지 않는다. 이러한 답답함은 일종의 치기 어린 회화적 모험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의지로부터 비롯되는데, 자칫 의식이나 태도가 고착화되어 더 이상 뭔가에 도전하거나 호기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을 우려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나의 그림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기복이 심하다. 어떤 것을 봐도 – 외형상 – 내가 그린 것 같지 않을 때가 있으며, 같은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엉성함, 혹은 열린 방식의 그리는 방법은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캔버스에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당장 그리고 있는 ‘그리기’ 자체에 몰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혹자가 이야기하는 나의 그림이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하는 변명 역시 아니며, 어떤 현상이나 흥취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형태를 시각화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대상을 그리고자 할 때에는 기억과 시 지각적으로 체득된 형태, 집요하게 관찰되어 마음대로 그것의 특징을 구현할 수 있도록 훈련된 손의 움직임에 의해 내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 해주기 위해 다각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도록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나는 그를 앞에 둘 필요가 없고, 그의 사진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림이 아닌 다른 매체도 가능한 일이고,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음성언어로도 크게 부족하지 않다. 반드시 의도를 담고 있는 그림이어야 한다면 대상과 오래도록 마주하다가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그리는 것이 솔직한 태도이다.
– 작가노트 중에서

윤현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할 때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익숙함 그거 아주 무서운거야!”
언젠가 나도 모르게 삶에 너무 익숙해지고 무뎌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기억의 순간들, 스쳐간 사건들, 말초적이고 자극적이지만 쉽게 잊혀져 버린다. 쌓이고 쌓여버린 그때의 기억 그 곳의 기록. 익숙해 저버린 현실에 지처 잊혀져 버리고 지워 버리는 우리의 기억들.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기억이 다른 기억으로 덮어버려 익숙해져 버린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건 아닐까?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세상에 우리들 역시 너무도 익숙해져 있구나. 최고의 스타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시끌벅적 했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 어느 누구의 입에서 화제가 되지 못한다. 그저 지나간 기억일 뿐. 내 인생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60억 세계인구의 하나가 죽었을 뿐 나의 학창시절 책받침의 여인은 내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허구이지만 실제일지도 모르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무의식과 익숙함에 자극적인 아니 좀 더 자극적이길 원하고 더 자극적인 것에 과거나 현재를 망각해 버리는 건 아닐까? 잊고 살 뿐 이건 지금 우리의 인생에 실제 일어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 작가노트 중에서

최지영

아마 관객은 최지영의 그림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소재와 색깔이 그런 기분을 자극한다. 길게 눕고 싶은 아늑한 침대, 지친 몸을 담그고 싶은 깊은 욕조, 그리고 눈을 부시게 하는 피곤한 빛으로부터 ‘어둠을 보호하는’ 은은한 촛불들까지. 그의 그림들은 우리를 적막과 고요의 세상으로 이끈다. 게다가 그림의 색깔은 울긋불긋하지 않고 단색의 모노톤이다. 모노톤의 어둠이 공간을 지배하고, 그 어둠 속에서 대상은 조그만 빛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살며시 드러낸다. 바로크 회화처럼 영혼을 위무하는 어둠이 회화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쾌락원칙을 넘어 최지영의 작품들은 프로이트주의자들이 보면 무릎을 칠 테마들로 뒤덮여 있다. 그들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최지영의 그림들은 죽음충동을 자극한다.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 죽음은 공포의 개념이기보다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인데, 생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불가능하지만 달콤한 꿈이다. 하지만 젊은 작가가 그 테마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사실 작가들이 테마들을 너무 의식하면 별로 재미없다). 그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그림으로 대신 표현했다고 자주 말했다. 편안한 침대를 갖고 싶었고, 정갈한 욕조를 갖고 싶어서, 그림으로 대신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죽음 보다는 오히려 세속의 에로스적인 욕망이 그림으로 표현됐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에로스적인 욕망은 그의 회화 수법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그림은 일반적인 회화 수법과는 다르다. 붓으로 ‘칠을 하며’ 형태를 완성하는 게 아니라, ‘지워가며’ 형태를 드러낸다. 그의 독특한 회화수법을 알기 위해 다시 ‘침대’ 시리즈를 보자. 먼저 흰색 캔버스에 검정색(푸른 욕조의 경우는 푸른색)을 덧칠한다. 그리고는 침대의 형태에 따라 부분적으로 검정색을 지워낸다. 색을 모두 지워내면 바탕색인 흰색이 드러나고, 덜 지우면 세피아, 더욱 덜 지우면 좀 짙은 세피아가 드러난다. 검정색으로 덧칠해놓은 캔버스에서 그 검정색을 조금씩 지워가며 원했던 대상을 드러내는 식이다. 지워내기 전에 아무런 밑그림도 없이 눈대중만으로 침대를 만들어내고, 욕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탄복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회화 수법은 초현실주의자 막스 에른스트가 즐겨 했던 그라타주(grattage, 색을 두텁게 칠한 후 표면을 긁어내는 것), 프로타주(frottage, 요철이 있는 물체에 종이를 대고 색연필 따위를 문질러 형태를 만드는 것) 등과 유사한 것이다. ‘긁어대고’ ‘문지르는’ 가운데 의도했던 이미지를 완성하는 수법이다. 당시의 관습을 모두 파괴하고자 했던 에른스트는 이 수법을 성행위와 관련지어, 회화의 결과물이 아니라 회화의 과정으로서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에른스트는 긁어대고 문지르며, 전통의 구속에서 에로스를 해방시키는 전복적 기쁨을 즐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지영은 작품은 에른스트의 행위와 비슷한 듯 약간 다르다. 비슷한 점은 그 수법에 잠재돼 있는 에로스적인 무의식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대개 정물과 같은 사물에 한정돼 있는 점이 에른스트와 다르다. 에른스트의 작품에는 에로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최지영의 작품에는 에로스와 죽음이 참 기묘하게 혼합돼 있는 셈이다. 프로이트가 그의 그림들을 본다면, “죽음은 에로스에 물들어 나타난다”는 자신의 명제를 되풀이 할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생명의 강렬한 은유처럼 보이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정물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죽음이 기묘하게 얽혀 있는 그의 그림들이 또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궁금하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에로스의 찬양 쪽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바로크 화가들처럼 바니타스의 허무로 더욱 빠져들지, 아직은 단정하기 쉽지 않다. 아마 그 사이 어디쯤에서 당분간 방황할 것 같다. 그 방황의 흔적들은 지금처럼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드러날 것이다.
– 한창호 영화평론가

황현승

STILL-LIFE
나는 실존적 물질세계의 투박한 힘에 관심이 있다. 그것은 몸으로 부딪혀 느껴지는 세계이다. 하지만 유물론적 관심은 아니다. 내가 물질에 관심을 두는 진짜 이유는 물질이 물질 너머의 형이상학적 세계로 들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리는 물체들은 하나의 ‘기호’이다. ‘문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내가 철저히 물질적인 물체들로 견고한 짜임을 만들고 색을 조화롭게 배열하면 거기서부터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 노래는 마음으로 들을 수 있으며, 사유의 공간을 창조하고 형이상학적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연다. 바로 여기가 물체가 기호화 되어 물질 너머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지점이다.
– 작가노트 중에서

I’m interested in practical and solid force in the existential material world. It is the world felt with the whole body, which is not to be seen as materialistic interest though. The real reason I lay my interest upon materials is that I believe the materials can be a key to the metaphysical world beyond the materials. In such sense, what I draw is one of ‘signs’ or possibly, ‘letters’. Music is played as I create a solid composition and arrange the colors neatly with the absolutely materialistic objects. The music is heard by heart, creates a private space and opens a door to the metaphysical world. At the very moment, the objects are symbolized to lead us into the world beyond the materials.

2019-01-11T07:34: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