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nd New 2
2007.9.13 - 2007.10.31
101-5 Cheongdamdong, Gangnamgu, Seoul
Exhibition Date : 2007.9.13 ~ 2007.10.31
Artists : 김시연, 서동욱, 윤병운, 이호련, 조성준, 황현승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 6명(김시연 서동욱 윤병운 이호련 조성준 황현승)은 원본에 기대지 않는다. 이들에게 원본은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원본이 아니라 차이를 내재하고 있는 현재적 모습, 즉 현재의 ‘해석’이다. 그러기에 이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다시, 쓴 이야기’와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맥락에 놓여 있는 ‘다시, 씌여지는 이야기’ 즉, 새로운 이야기이다.
김시연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노출된 사회이다. 인터넷은 정보를 모으고 보호하고 관리한다는 개념을 가볍게 만들면서 개개인의 삶에 지나치게 깊숙이 침투하곤 한다. 일단 정보가 인터넷에 올라가면 누구나 공인이 되어버리고 누구나 접근 가능한 정보가 된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인들을 노이로제에 걸리게 한다. 내가 어딘가에서 몰래 촬영되고 있을 것 같고, 누군가 나를 알고 있을 것 같고, 내가 하는 행동을 볼 것 같다. 이미 공인이 된 연예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며 재미있어하는 현대인은 동시에 자신도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너무 쉬워지니 웬만한 사건에 놀라워하지 않는 현상이 생겼다. 그래서 사건은 점점 자극적이 된다. 뉴스를 보면 흉흉하니 뉴스를 보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날 정도이다. 방문을 열면 온통 흉포한 세상이 펼쳐질 것 같다.
이제 김시연이 왜 사적인 공간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지 명확해 진다. 집의 내부 바닥에 소금을 섬세하게 깔아두거나 물건을 쌓거나 혹은 늘어놓거나, 실로 연결하거나 비누의 날을 세우거나 하는 등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다는 강박증이 드러난다. 그것을 잘 못 밟았을 때 정교한 패턴이 무너지면서 이를 건드린 이들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며 ‘파괴’라는 어㉯?한층 실감나게 될 것이다. 사적인 것에 더 쉽게 침투 한다는 것은 그만큼 폭력적인 행위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더 커지는 것인데, 이놈의 사회는 알권리를 주장하며 그 폭력성을 정당화 한다. 김시연은 바리케이트 장면을 전시장에 직접 설치하지 않고 사진으로 보여준다. 가끔 설치작업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사진으로 보는 것 보다는 오히려 현장감이 떨어져 보인다. 전시장은 기본적으로 보호받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시장에 설치된다면 아마도 아슬아슬 〈묘기 대행진〉같은 꼴이 될 것이다. 대신 그녀가 촬영하는 현장들은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공적인 공간이 아닌, 누구네 방, 누구네 욕실, 누구네 거실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이며, 여기서 특정인 누군가가 집 안에서 사용되는 물건들로 보호막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를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정보를 얻는다. 이 집에는 이런 그릇이 있구나, 저 집 사람은 저런 책을 읽나보다. 게다가 이 보호막은 너무 연약하여 가까이만 가도 무너질 듯하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약하다. 너무 연약하여 이 보호장치를 보호해야 할 지경이다. 보호의 행위는 엉뚱하게도 그 본래의 목적을 잊고 이 보호장치를 향해서 이루어진다. 이 집의, 이 공간에 들어서려면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고 바리케이트 가까이 접근한다면 이 섬세한 장치가 무너지는 순간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타인은 이 바리케이트를 피하고 접근하기 꺼려진다. 오히려-김시연의 작가 노트에 의하면- 이 바리케이트를 만든 자신에 의해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다.
김시연의 작품의 설치는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 묘미이다. 너무 정교하게 지탱하고 있어서 건드리면 무너지는 것들을 누군가의 집 내부에 설치하고 이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이미지로만 보여면서 그녀의 작업은 기록의 성격을 가지게 되며 사진의 사각 틀 속에서 그녀의 바리케이트 또한 보호를 받는다. 보호하고자 하는 것을 보호하는 장치를 보호해야 하는 이 전시는 ‘방책(防柵)’이라는 제목으로 또 보호 받는다. 얼마나 둘러싸고 저항하면 진짜로 보호받을 수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끝없이 고민하는 강박관념으로 정신세계가 무너질 것 같은 지독한 위태로움이 김시연의 사진에서 예쁜 장식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또한 멋진 위장술 아닌가. 알짜배기 정보는 절대 얻어지지 못한다. 너무 섬세한 함정이 많기 때문이다.
서동욱
서동욱의 작업은 그만의 사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일상에서 만나는 인물들에 관한 개인적 경험을 영상과 유화로 기록하여 재현한다. 시간성이라는 측면에서 상반되는 이 두 매체는 때로는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작가는 여기에 개인적 글쓰기와 내레이션이라는 텍스트를 덧붙여 자신만의 서사적 몸체를 만든다. 서동욱의 초기 작업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2004년작 ‘Mimi 미미’ 에서는 한 여자(작가는 그녀를 미미라고 이름 부르기를 좋아했다)가 남기고 떠난 소지품을 단서로 하여 그녀가 파리에 도착해서 떠날 때까지의 행적을 추적하는 내용과, 그녀를 대학 때 처음 알게 되고 파리에서 다시 만나 짧은 사랑에 빠졌던 기억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교차시켜 보여준다. 20대 남자의 여자친구 이야기라는 다분히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작가는 유화와 비디오라는 두 가지 매체로 기록하여 감상적이고 독특한 서사적 파열을 만들어 낸다.‘연애에 탕진한 나의 20대에 바침’이라는 말로 끝맺는 그의 텍스트는 감각적이고 센티멘털하다.
비주얼 다이어리와 전통 초상화적 형식이 결합된 서동욱의 초기 회화 작업은 소형 카메라에 장착된 플래쉬를 이용하여 인물을 취재하는 데서 출발한다. 내향적이고 우수에 찬 성격을 쉽게 드러내는 그림 속 인물들은 그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 심지어 피부에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취재하는 데 사용되는 카메라의 강한 섬광은 사진 속 인물을 마치 플래쉬 속에 완벽하게 노출된 야생동물의 불안한 모습처럼 묘사하고 있다. 강한 섬광으로 인한 진한 그림자는 인물들을 배경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어떠한 세계에도 소속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플래쉬의 모티브는 그의 새로운 영상 작업 ‘rue du theatre obscur 불 꺼진 극장의 거리’ 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연결점을 찾는다. 서동욱은 자신의 새로운 유화작업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회화적 스타일을 시도한다. 도시는 해질 무렵이거나 밤의 풍경이다. 인물은 홀로 한 도시 속 거리에 서있지만 그나 그녀가 그 공간에 속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신작에서 인물이 속해있는 공간 전체를 추상화라 생각하여 물감을 털고 흘리고 닦아 내는 등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묘사한다.
quai de la senne’는 어두운 밤, 파리 세느 강변의 한 극장 앞에 서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기억 속 한 장면이 그러하듯이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밤의 파리를 배경으로 서 있지만 그 곳에는 이미 존재하지는 않는 환영이 된다. 신작인 2채널 비디오 영상작업‘rue du theatre obscur 불 꺼진 극장의 거리’에서 작가는 서사적 완결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A 채널의 남자는 공중 화장실로 종이 한 장을 찾으러 들어가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 종이에 적힌 호텔 코코비치의 주소가 A 채널과 B 채널을 연결하는 유일한 지점이 된다. 탐정소설을 연상시키는 B 채널에서는 얄개시대로 한 때 유명했던, 배우 이승현 찾기가 전개된다. B 채널 영상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들… 고속도로와 자동차, 잊혀진 배우와 술집 여주인 등은 모두 수명이 짧고 금방 잊혀져 버리고 마는 존재들이다. B급 문화인 탐정소설을 패러디하는 형식적 실험을 통해 작가는 잊혀지는 존재들에 대한 기억을 탐구한다. 두 채널이 만나는 지점인 몽펠리에는 은퇴한 노인들이나 남아서 쇠공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쇠락한 휴양도시이다. 작가는 실제로 몇 년 전 5월에 몽펠리에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데, 휴가시즌전의 쓸쓸함만이 남아있는 s te 해변에 관한 기억을 토대로 작품을 시작했다고 한다. 코코비치라는 미국식의 촌스러운 호텔 이름 또한 70년대에나 존재했을 법하다.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 감독들이 미국의 B급 문화를 막연히 동경했듯이, 서동욱의 영상은 누벨바그에 대한 향수와 유럽문화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한다. 기존 영화의 짜임새 있는 구조가 아닌 느슨한 구조의 미학적 형식 속에서 실존주의에 바탕한 소통이 불가능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의 작품 속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순환되며, 이러한 곡선적 시간 구조 속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폼을 잡는 청춘은 짧고 허탈하다. 서동욱은 대학을 마치고 간 유학지 파리에서 5년간 거주했다. 이후, 그의 작업에는 센티멘털리즘과 나르시시즘이 공존한다. 작가는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현대,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20-30대 지식인 중산층의 진부한 모습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플래쉬 속 불안한 도시의 젊은이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기에, 작가는 청춘의 모습을 비꼬거나 조롱하지 않고 동질감과 연민 속에서 그려낸다. 작가는 이러한 짧은 젊음의 허무함을, 영상과 유화라는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이 상이한 두 매체에 사적인 글쓰기와 내레이션을 중첩시켜 그만의 서정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다.
윤병운
일상과 환영
인간의 삶에 스펙트럼이 있다면 그 극과 극은 생존과 유희가 될 것이다. 생존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삶의 단위에서 이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삶을 영위해간다. 이 영위 속에서 만남이 있고 이상한 삶의 여행이 있고 과정과 역사가 생기며 유희라는 여유도 피어난다.
예술은 그러나 단순한 여유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세상에 대한 온갖 시선과 성찰, 그리고 고통, 환희 등의 감정과 사상들이 복잡하게 녹아있다. 더욱이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해볼 때 예술은 우리 삶의 편린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해주며 고통을 무르게 해준다는데 있다.
니체가 예술을 도피(escape)와 도취(intoxication)로 파악한 것은 이러한 취지이다. 윤병운의 예술작품은 도피와 도취가 뜻하는 예술의 기치가 그대로 녹아있다. 바다와 토르소, 자동차와 큐피트의 조각 등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상이지만 윤병운의 의도에 의해 전혀 다른 범주로 이행해버린다. 그가 보는 주제는 의식과 기억, 그리고 꿈이다. 실재(real)의 소재를 환영(illusion)의 주제로 변용시키는 것이 윤병운의 일관된 작업의지이다. 예술에서 소재(matter)와 주제(subject)는 천양의 차이가 난다. 소재는 예술가가 차용하는 단순한 대상이자 모티브이며 주제야말로 예술가가 보았던 세계에 대한 의식의 총체적인 색채이기 때문이다. 윤병운의 회화에서는 일상의 세계와 환영의 세계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은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삶이 시간이 흐르면서 애매하게 뭉뚱그려져 모호한 잔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일상의 편린 속에서 느꼈던 자기감정을 명료하게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윤병운이 이야기하는 것은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우리의 의식은 변할 수밖에 없으며 지난 과거 또한 주관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삶이 진행될수록 자기 삶의 과거는 “새로운 과거(newly obtained past)”가 된다.
우리의 일상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다. 그 모양이야 어떠하던 진행되는 삶 속에서 새롭게 변하는 것이 우리의 기억이며 의식이자 과거이다. 애초에 일상의 감정은 환영과 구분될 수 없음을 윤병운은 예술로 보여준다. 레떼의 망각 속에서 다시 솟아오르는 날개야말로 “과거”는 “새로운 과거”라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끝으로 윤병운의 회화를 보면서 13세기의 미학자 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의 명언을 인용하고 싶다. 그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지 말라. 아름다움을 찾을 때 물리적 개념이라는 어두움과 미혹의 구름이 당신 앞에서 처음 빛났던 명료한 형상을 어지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ask not what beauty is, for at once the darkness of physical notions and the clouds of delusion will come forth and trouble the clear image which at first sight shone forth for you when the word beauty said) ”고 말한다.
참으로 윤병운의 회화의 놀라움은 말로 생각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처음 눈앞에 대하던 상쾌한 기분의 공기를 그대로 들여 마실 때 더욱 극화되기 때문이다.
이호련
현대 여성의 매력 중에 하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당당함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몸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자기애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자기만족은 화면 안에 여러 이미지의 감정들로서 중복되어 나타난다. 누군가를 위해 또는 거울 앞에서의 행동들은 자신의 내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감정들이며 그 각각의 이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억일 수도 있고 상상일 수도 있으며 인식 가능케 하는 조건일수도 있겠다.
나는 화면 안에서 이러한 감정들의 이미지를 조합하여 여성의 몸을 그린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당당함 또는 수줍음을 그린다.
나는 중복된 각각의 이미지들은 혼란스럽게 보여지 되-시간의 경과로, 잔상의 중복으로,
관음적 사고 등으로- 미를 추구하는 심적 충동이 당연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이 보여지기를 원한다.
– 작가노트 중에서
조성준
상징주의 화가들은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고 비합리성을 추구하면서 비사실적 주제를 선택해 일상적 이미지로 미술을 전개 시켰다. 조성준 그림을 보면서 상징주의 화가들과 조금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세계를 떠올리는 것은 그의 그림이 주는 단정하기 어려운 어떤 시각적이고 신비로운 힘 때문이다.
조성준의 그림은 분명하게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다는 명료성을 노출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사실적이며 비현실적인 풍경들은 모던한 형식과 요소들을 비켜서고 있다. 그의 비현실적으로 쌓여있는 책그림 에서 또는 나체들로 쌓여져 있는 <님프>의 나무그림에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그 자신의 내면적 풍경으로 완성된 미스터리를 볼 수 있다. 그 풍경들은 정적이면서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정적이면서 충분히 마술적일 만큼 그의 풍경들은 그에게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풍경들은 그가 살던 뉴욕의 풍경이나 그가 산책한 혹은 머물렀던 유럽의 풍경들이다. 그의 장면들은 이국적이지만 구체적인 역사성의 이미지는 발견 할 수 없다. 그 풍경들은 아마도 그가 새로 찾았거나 잃어버린 풍경들이다. 그의 그림은 이렇게 발견과 잃어버림의 경계에서 늘 반복된다. 그의 그림들이 몇 년씩의 제작년도 기간을 가지면서 반복적으로 덧붙여 그려지는 것은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로서는 아주 빈번한 일이며 상습적인 행동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의 잠자는 궁전의 소녀의 표정과 이미지는 분명 어떤 암시적인 인상이지만 여전히 애매모호함은 남아있다.
황현승
‘현대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감수성’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내 그림은 알기 듣기 쉬운 언어다. 다수에게 이해되고 다수에게 뚜렷한 느낌을 전해주는 ‘대중적 이미지 창출’이 나의 목표다. 예술은 특별한 감성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독점 되어서는 안 되며,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치밀한 묘사와 효과적인 화면구성으로 단순하면서도 힘 있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한다.
사탕은 작지만 세계적이다. 사탕은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을 너무나 쉽게 집약해서 보여주는 인공적 기호식품이다. 그리고 사탕은 대중적이다. 이것이 내가 사탕을 그림의 소재로 택한 이유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그린 사탕을 보며 ‘달콤함, 천진함, 사랑’과 같은 어렵지 않은 언어들을 떠올리기 원한다. 그리고 강렬한 색감에 들뜨고 사실적 형태에 희열하며 정신적 해방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 작가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