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th Cheongdam Art Fair
2007.8.24 - 2007.9.2
101-5 Cheongdamdong, Gangnamgu, Seoul
Exhibition Date : 2007.8.24 ~ 2007.9.2
Artists : 김남표, 노해율, 서지선, 이병호
현재 미술 시장의 흐름을 가장 빠르게 볼 수 있는 제 17회 청담 미술제가 막을 연다.
청담 미술제에 처음으로 참가하는 유진갤러리는 작품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움직임과 역동성, 그리고 소리와 영상에 이르기까지 관람객의 다감(多感)을 만족 시킬 수 있는 네 명의 작가와 작품으로 그 첫선을 장식한다.
유진 갤러리의 네 면의 공간을 채워줄 작품은 감상으로 부터의 감동 이외에 그 이상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김남표
작가는 오래 전부터 시간성이 배어있는 대상에 대해 집요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는데, 이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낡고 오래된 것이 새것에 의해 대체되어 소멸되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아쉬움이 본인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작가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사물다움을 그 사물의 고유한 형태로 인해 생겨난 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작업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신발은 발이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형태와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공간을 자연의 풍경이 있는 공간으로 전이 시킴으로써 사물의 구조적인 공간을 다시 인식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커피잔에 커피를 담기 보다는 폭포로 가득하고 신발 안에서 나무나 동물이 존재하는 공간을 상상함으로써 사물의 고유한 기능적 속성에서 벗어나 거대한 풍경을 구성하는 구조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물의 이상한 조합-커피잔에 신발을 올려 놓는 비일상적인 사건-을 기이한 사건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아름다운 풍경의 미적 사건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사물의 형태가 가지고 있는 기능적인 요소를 배제한 하나의 미적 형태와 공간으로 인식하였을 때 그 사물의 진정한 사물다움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으로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노해율
자연성 및 일상성을 모토로 현대문명이라는 지극히 다원화될 수 있는 주제를 간략하고 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펼쳐오고 있는 그는 오랜 전통의 순수 조각에 관한 개념들을 나름의 해석으로 받아들이되 내면적으로 걸러내어 시선의 이동을 이루려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노해율은 근작들을 통해 조각이 지니는 즉물적 본성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방법과 재료를 극대화시켜 입체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친 대중적이며 동시에 참여적이다. 적어도 그의 작품 앞에선 작가는 만들고 관람객은 보기만 해야 하다는 고정관념 따윈 벗어던져도 된다. 누구든 보고 듣고 느끼며 직접 작품의 일부로서 호흡할 수 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장소성’과 ‘상징성’ 측면에서 보다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에 다가서면서도 심리적으로 훨씬 안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작자와 타자에게 동시성을 주문하는 대범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최근 선보이고 있는 스윙(swing)연작들은 ‘새로움을 표출하는 조각’이라는, 기존 픽셀화 된 모니터 작품과는 다른 차원의 설명을 요구해 관심을 끈다. 그동안의 주된 주제였던 ‘일상’에서 벗어나 대기와 순환, 자연이나 그 흔적 등으로 표현성은 십분 넓어졌으며 공학매체 자체를 오브제로 하는 작품들이 선보여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영상작업이 하드웨어에 중심을 둔 것이었다면 지금은 구조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환영이나 가상공간이 아닌 실제적인 것, 전통적 조각의 범주에 보다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작들의 특징은 스윙(swing) 연작을 통해 고정적일 수밖에 없는 볼륨과 매스가 바람과 같은 무형의 영향을 거치면서 비정형의 움직임을 나타내도록 했다는 점이다. 작가는 헬륨이 가득 담긴 반투명비닐봉투작품을 2차원의 전시 공간 속에 띄우곤 구체적인 물질로 환치시키는 방법을 선보인 이후 다시 나무나 처마 밑, 지하철 환풍구 등으로 확산 시켰다. 이는 구체적인 양감(量感:volume)의 구성체로서 주변 환경과 혼재되거나 분리되면서 각각의 다른 심상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으며 고착화된 조각관념의 변환이자 칼더식 움직이는 조각의 한 예였다. 또한 공간을 아우른다는 기존 조각적 가치에 충실하면서도 돌이나 나무 따위의 고전적 소재에서 이탈하려는 실험의지가 돋보이는 작업이랄 수 있다.
최근 그는 소리마저 조각의 범주에 넣기 시작했다. 모터를 중심으로 원형의 틀을 끼우고 동일한 회전을 반복하는 장치를 통해 이전 작품인 스크린 속 음향 바(bar)를 현실에 가시화시킨 작품이다. 축을 기준으로 하여 외곽으로 뻗어나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조형원리는 일종의 확산과 응축, 그리고 분해와 집합이라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움직임에 따른 소리의 발생이다. 매우 규칙적인 기계음이 인지된 시각에 청각이 더해져 공간감적 상태를 만들어간다. 이처럼 자유로운 반면 일정한 규칙성을 띄는 그의 작품들은 조각의 재현성을 벗어난 연구된 결과물들로서 소리와 움직임이라는 두 방향에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서지선
외적인 세계가 현실이다. 팝아트는 현실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일상이 작업이고 작업이 일이다. 라는 가정 하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일상의 단면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데,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 되어 사진의 공유가 일반적으로 용이하여 졌으므로 이런 선택적 행위역시 나에게는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친구들과의 만남과 여기에서 오는 서술성(narrative)은 특별한 장소, 특별한 사물들이 작가만의 단순화된 이미지와 재해석된 색채로 캔버스에 옮겨진다.
이미지는 실루엣 혹은 선으로만 보여지기도 하고 현대의 감각적 유행(fashionable) 패턴의 일부분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화면에 각각의 배치된 사물의 정지되어 있는 듯 보이는 상황이 때로는 모호한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는 유리잔이다. 유리라는 소재가 가지고 있는 반사와 투시의 특성이 나에게 특별한 매력을 준다. 이것은 반사되는 주변 상황을 단순화 하여 감각적 형태로 표현하게 된다. 또 대량생산되는 상품의 나열과 나열된 적체(積體)와 소비적 내용이 자신의 모습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파스텔 톤의 색은 차분하고 세련되어 보이며, 비슷한 톤의 색채들의 배치는 사적인 일상들을 경쾌한 느낌으로 보여주기에 적합한 색으로 선택되어 채색되고 있다. 작품에서의 회색과 푸른색, 연두색과 주황색의 조화롭지 않아 보이는 색상 배합은 시각적인 흡입력과 에너지를 더해주고 있다. 사물의 그림자와 빛의 관계에 있어서 페트릭 고필드(Patrick Gaulfield)의 신구상주의 회화나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팝아트에서 차용된 만화 이미지처럼 빛을 배제했다. 하지만 그림자를 통해 공간을 구성하였고, 또 하나의 형태로 유기적 화면의 이미지를 구상적으로 배치되고 있다.
채색 방법에서의 반복된 노동의 결과는 얼룩지지 않고 부드럽게 채색된 화면으로 보여지게 한다. 마티스(Matisse)가 시도한 바 있듯이, 캔버스의 배경을 단색으로 채색하고 그 위에 선택된 이미지들을 배치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이미지들은 서로간의 분합(分合)에서 오는 색의 조화를 고려하여 반복되며, 섬세한 붓질로 채색되면서 화면 전체를 채운다. 이 때 사용되는 색은 내 자신만의 규칙에 맞는 절제된 몇 개의 색이다.
작업에서는 대중적인, 교묘한, 일시적인, 젊음이라는 팝아트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일상에서 오는 끊임없는 소재의 발견이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 즐거움을 주고, 상실될 것 만 같은 자아를 찾아가는 노력도 포함되어 있다.
이병호
우리의 삶 속에서 공기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을까? 무릇, 공기가 없다면 지구 표면은 격렬한 태양광과 태양열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고,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물이 존재할 수 없는 환경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청각을 사로잡는 세계의 소리들 역시 공기의 순환이 없다면 공간 속에서 전파되지 않을 것이며, 물체의 연소 마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사활과 생명체의 존재여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거머쥐고 있는 공기의 중요성은, 그것이 특이 현상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 속에서는 그 존재감을 쉬 느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거센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는 토네이도, 빛으로 방출되는 색색의 오로라 광경, 오염된 환경을 이리 저리 옮기고 돌아다니는 스모그와 황사. 인간의 안일함은 아무리 중요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장된 형태로 재해를 일으키거나,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현장으로 눈 앞에 드러나지 않는 이상, 그것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살아갈 수 없도록 종용 한다. 손바닥을 뻗어보면, 그 위로 100kg의 공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믿어지는가?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것이 공기라 하더라도, 어떤 물질들은 공기와의 접촉으로 인하여 산화와 부패, 발효의 과정을 겪게 된다.
공기라는 요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생명체로 하여금 호흡과 생명의 유지를 가능케 해줌과 동시에 변질과 감염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양가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작가 이병호는 인간이 끊임 없이 사유하고 그 자신의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무수한 외부적 요인, 요소들에 의해 인간의 삶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크고 작은 영향권 안에 존재할 수 밖에 없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부모를 비롯한 외부의 자극에 의해 학습에 학습을 거듭하게 되는 인간은 어찌 보면, 이러한 일방향적 사회화의 경험을 통해 수동적인 입장에서 생을 시작하고 또 마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인간과 외부적 환경 간의 이미 정해진 운명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공기라는 물질의 양가적 특성을 대입시키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연구,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작가에게 공기라는 물질은 불특정한 한 사회의 문화나 전통, 관습, 유행 혹은 문학, 영화, 스포츠, 언론, 인터넷, 텔레비전 등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수한 문화적 매개체에 비유된다. 우리 몸에 들어왔다가 내뱉은 공기는 또 다른 이의 호흡이 되고, 또 그 사람이 내쉰 공기는 또 다른 누군가의 호흡이 되며 순환에 순환을 거듭한다. 이렇듯 우리가 내뱉은 말(사상)이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또 그 사람 나름의 해석이 부가된 말과 사상이 또 다른 사람에게 회자되는 가운데 역사는 진보하고, 인간의 사유는 확장되어 왔다. 작가 이병호는 이러한 사고의 전이가 공기의 물리적 흐름-경로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초기 작품을 살펴보면, 그는 상당 부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최근의 작업 역시 공기의 압력차를 이용하여 물질의 변화를 구현하고 이를 지켜보는 것에 초점을 둔 것으로, 공기의 주입량과 압력에 의해 작품의 모양이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공기를 인간의 삶에 미치는 외부적 환경 요소들로 비유, 상기하여 작품을 바라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즉, 작가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의 작업을 통해 공기라는 물리적 특성이 특정 대상에게 꾸준히 영향을 주고 변화와 변질을 일으키는 과정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한다. 그의 작업에서 공기는 대상의 안팎을 드나들며 대상의 형상을 일그러뜨리고 복구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과연, 이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서 원하는 순간에만 공기를 주입하고 차단할 수 있는 그의 작품처럼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자유의지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감을 무시하며 살아갈 수 없는 이 세계의 공기라는 요소처럼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외부적 환경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 역시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다. 우리는 이병호의 작품 속에서 공기의 압력차와 주입량에 의해 변화 와 변질의 과정을 겪어나가는 대상을 지켜보며, 외부 자극에 의해 끊임 없는 변질과 복구를 거듭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나가는 인간의 본질과 순수성에 대해 또 다른 관점을 가져볼 수 있을 것 같다.